회사 안에서 건강을 챙기는 여정의 시작 : 디카페인 생활
40대 중반이 되어 건강 검진을 했더니 각종 노인성 질환이 발견되었다. 이를 테면 고혈압, 전립성 비대증, 녹내장 같은 질환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만나게 될 친구들로 예상은 했으나, 생각보다 이르게 만나게 되서 당황스러운게 또 사실이다.
녹내장, 고혈압 그리고 자율신경장애 같은 질환에 혈압을 높이고, 신경을 예민하게 하는 카페인은 쥐약이라고 한다. 병원 의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카페인을 끊기로 했다. 근데 직장인이 카페인을 끊는게 어디 쉽나. 하지만 두 달이 되는 지금까지 디카페인 생활은 순항 중이다. 아내가 ‘어디 한 번 의지를 보여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의지를 아이들 생각해서 한 번만 끊어봐.’란 말이 그렇게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흔히들 채식으로 살을 빼는 사람들에게 ‘코끼리는 하루에 풀을 300kg 먹는다.’는 말로 풀 많이 먹는 코끼리와 다를 바 없을 거라면서 다이어트의 의지를 꺾곤 하는데, 나도 디카페인을 선택한 대신에 디카페인 커피를 하루 세 잔은 먹어 평소 카페인 커피 먹던 양을 초과하게 되었다. 디카페인계의 코끼리가 된 셈이다. 디카페인커피에도 미량의 카페인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기존 먹던 카페인양과 동일할지도 모를 일이다.
먹어보면 알게 된다. 디카페인 커피들이 얼마나 맛이 없는지. 커피에서 카페인을 빼내는 공정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카페인만 빼낼 일이지 특유의 커피 향을 함께 제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게 되면, 그 흔한 맥심 커피 냄새마저, 향기롭기 그지 없다. 점심을 먹고 나면, 평소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맥심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나는 군 생활을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했다. 누군가, 상근 예비역이 방위 아니야 하는 수준 낮은 질문을 하면, ‘지금 전국의 1000만 병장 제대한 상근예비역 출신들이 방위라는 말에 킹받아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 오고 있습니다. 저기 먼지 바람보이시죠.’ 같은 시덥지 않은 답변으로, 사람들을 깔깔 웃게 했다. 상근 예비역 하던 때에는 집에서 출근하기 위해 군화끈을 질끈 쟁여메고 집 문을 열고 나오면 마음이 벅차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집에서 게임하고 웹툰이나 보며 뒹굴대던 하등 쓸모없는 ‘일반인인 나’는 없고, 그 자리에 나라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복무하는 ‘군인인 나’가 있구나 하는 마음이랄까.
통제는 가끔 더 큰 행복을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장치가 된다. 군 생활에서 하루 외박이 그렇게 기쁠 수 없듯이. 프로젝트 끝나고 누리는 휴가는 또 얼마나 홀가분한지. 결혼 생활과 힘든 육아 중에 토요일 잠깐의 외출 허용은 또 얼마나 (짧아서) 소중하고 달콤한지. 일본에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있고, 한국에는 엄격하게 글자수가 제한된 시조가 있다. 그렇게 짧은 문구안에 인생의 희노애락이 다 담기고, 정제되고 통제된 언어에 담긴 인생의 아포리즘을 보며, 독자가 느끼는 희열이 있다.
아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쓴 하이쿠의 일부이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75세 일본 할아버지 (책 제목이기도 함)
연상이
내 취향인데
이제 없어
- 92세 일본 할아버지
제한된 글자수에 정제되고 함축된 내용이 담겼다. 해학이 있고 인생의 진리가 있다.
비약일 수 있지만 디카페인 커피가 그렇다. 마시지 않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이 영역은 통제의 영역으로 구분되고, 통제된 곳에서 맛있는 디카페인 커피를 찾는 여정과 모험은 시작된다. 쉽게 얻는 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 수많은 힙한 카페들 투어를 하면서 수백잔의 맛있는 커피를 마셔왔지만 그때는 항상 그 커피 맛을 제대로 향유하기보다는 평가절하하기 바빴다. 그렇게 찾아가 마실 만한 맛은 아니지 않나, 하면서.
하지만, 커피가 통제의 영역이 되는 순간 카페인의 영역은 영영 내가 다가가지 못할 삼팔선 이북의 영역이 되고, 삼팔선 아래의 지역에서 최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땐, 맛도 맛이지만 카페인 커피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가느냐가 판단의 근거가 되고, 옛 기억을 떠올려 오 이건 꽤 카페인 커피 같네가 최고의 찬사가 될 수 있다.
삶은 얼마나 단순한가. 아니, 뇌는 얼마나 속이기 쉬운가. 회사 생활에서 하기 싫은 업무가 있고, 또 함께 일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나만의 울타리안에 가두고 통제의 영역으로 제한해 보자. 인사이드 아웃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형형색색의 장기기억장치의 구슬처럼, 그 구슬로 기억을 옮기고 '접근 금지' 팻말을 달고 주의를 표하는 빨간색을 칠해보자. 계속 그 사람과 그 업무에 몰두해 열을 올리는 대신에, 쉽게 트리거링 되는 단기기억장치 대신에 저 멀리 기억 저편의 장기기억장치로 옮기고 자연스레 잊혀지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업무를, 그 사람을 대면해야 할 때 새롭게 접근하는 공략법을 찾다 보면 다른 긍정적인 기억영역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화학적으로 결합하면서 의외의 영역에서 장점을 찾고, 희열을 얻을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