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촉과 미끄러지는 종이의 저항이 이븐함 : 만년필과 몰스킨
생각이 많은 날에는 만년필과 몰스킨을 꺼내 든다. LAMY 만년필은 학회 컨퍼런스에서 받은 것이고, 몰스킨은 ALM 솔루션 회사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다. 둘 다 꺼내만 놓아도 좋다. 갖고 싶었지만, 내 돈으로 구매할 생각은 없던 제품들. 하던 업무를 잠시 중단하고, 꺼낸 필기구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적었다가 두 줄을 짝짝 긋는다. 올 해 학회에 제출할 논문 아이템들을 필터없이 나열해본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내가 뽑아오라는 증명서 생각이 난다. 어제 노트에 적은 내용이다.
20대엔 필기구를 모으는게 작은 취미였다. 제주도나, 일본 등 여행지를 방문하면 동네 수제 문구점에 들려, 조그마한 노트나 볼펜 하나 정도는 기념품으로 사오곤 했다. 그렇게 수집한 필기구는 가지고 다니다가,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적당하다.
결혼하고 나서 이사할 때 마다 '혼저옵서예' 조랑말이 그려진 노트나, 오사카 성이 그려진 볼펜 등 바리바리 싸온 (한 번도 사용안한) 필기구가 짐처럼 딸려오는걸 보며 아내가 한마디 했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이제 필기구는 그만 모으지?”
나이랑 필기구랑 무슨 상관인지 도통 모를 일이지만, 아내의 질문에 다른 의문점을 가지지는 않기로 한다. 아내의 말은 항상 옳기 때문이다.
이제는 딸아이 선물로 간혹 예쁜 노트와 필기구가 있으면 사오는 편이고, 나를 위해서는 특별히 뭔가를 구매하지는 않는다.
만년필과 몰스킨을 써보면 이 제품들이 왜 오랜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지 알 수 있다.
전에 다녔던 IT 회사에서는 사무용 의자가 허먼밀러 였다. 이게 왜 백만원짜리 의자야? 쓸 때는 그다지 편한 점이 와닿지 않아, 그 가격에 뜨아했는데, 다른 의자를 쓰는 지금에야 오히려 허먼밀러의 편안함을 도드라지게 느낀다. ‘아 허먼밀러가 진짜 편한 의자였구나!’하고. 사용하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막상 다른 걸 쓰게 되면 알게 되는 그 디테일과 편리함.
만년필과 몰스킨은 그 조합이 좋다. 펜촉의 미끄러움을 적당히 반발하는 종이의 저항 정도가 이븐하달까. ALM 솔루션 회사에서는 센스 있게 매년, 캘린더 페이지가 따로 없고 회사 로고가 뒤에 작게 박힌 몰스킨 다이어리를 선물로 준다. 올해도 그 다이어리를 협력사인 솔루션 업체로 부터 몇 권 받아왔는데, 쇼핑백에 든 다이어리를 보고 지나가듯 오 몰스킨 이네요, 하고 부러운 듯 감탄사를 내뱉는 다른 팀 후배가 있었다. 욕심껏 세 개를 내 몫으로 챙겨뒀는데, 가치를 알아보는 후배에게 한 권을 선뜻 내어 주었다.
대학생 때 누나가 영국의 밴드 '스팅'의 내한 콘서트 표를 두 장 줬다. 관심있는 여학생 있으면 같이 가라면서. 나는 스팅이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그리고 같이 갈만한 여자사람도 없고)
"걔네가 누군데?" 하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유명한 밴드 있어, 표 구하기 정말 힘들어. 귀한 표니까 미리 노래 좀 익혀두고 가면 좋을꺼야."
그 이후, 표 두 장을 지갑에 넣고 다녔는데, 며칠 후 누나가 물었다.
"노래는 들어 봤어?"
"아니 아직."
"그러면 표 다시 내놔. 스팅에 환장하는 회사 직원이 있더라.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는 게 낫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는 게 낫지, 아무렴. 너무 맞는 말이라 아까워 하지도 않고 표를 도로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레옹의 OST, 'Shape of my heart'가 스팅의 노래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 그 스팅이 이 스팅이었구나. 그제야 내한 공연 티켓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다.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회사에서 중요한 업무가 주어졌는데도, 내 업무가 바쁘고, 앞으로 뭘 해야 할 지 내 커리어에 명확한 방향성 없이 하루살이 처럼 직장생활을 하루하루 살다보면, 주어진 업무의 경중을 쉽사리 판단하지 못한다. 지금 업무에 다른 업무가 더해 졌다는 부담감이 커서, 아 지금 여유가 없어요, 하면서 중요 업무의 가치를 모르고 반려하는 경우도 있다. 가치를 알아보고자 하는 의욕도 없고, 시간도 없다는 핑계로.
현X자동차그룹에서 근무할때 KPI 설정 시, 기획성 업무, 운영성 업무, 혁신 업무 각각 3:5:2 정도로 배분을 했다. 그 중 매년 유사하게 진행되는 운영성 업무의 가중치가 제일 낮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혁신 업무의 가중치가 제일 높은 편이다. 이는, 우리가 루틴하게 진행하는 운영 업무를 벗어나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업무, 새로운 먹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임직원에게 챌린지를 하는 것이다. 사실 운영성 업무는 루틴하게 진행되어 쉬워 보이지만, 회사에는 반드시 필요한 업무이고 내 공수도 많이 투입하는 업무이다. staff 부서나, 시스템 유지보수 업무는 이렇게 루틴하게 진행되는 운영성 업무가 많아, 내부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피드백을 받고, 개선하고, 때론 사용자로 부터 불만 사항도 많이 듣는다. 이렇게 내 시간을 많이 쏟고, 임직원과 소통도 잦고, 업무에 늘 쫓기니 마치 내가 중요한 업무를 하는 듯 착각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업무는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일 수도 있다.
운영성 업무를 오랜 시간 담당해서 해당 도메인에 대한 지식이 출중하고, 업무에 대한 노하우가 손에 익은 사람 중에, 간혹 업무와 나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사업계획 업무와 과제/투자 심의 업무를 5년 넘게 하다보니 루틴하게 업무를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시점에, 모든 연구원들이 과제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는 사람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기에, 내가 마치 이 회사의 중요 의사 결정자가 된 듯한 착각을 했다. 업무에 대해 무지한 이야기를 하거나, 내 업무를 무례하게 침범하거나 또는 업무를 은근히 더 부여하거나 하면, 기를 쓰고 관련 인원들과 싸워야 했다. 내 영역을 지키고, 내 시간을 지키기 위해.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지켜주냐 내가 이 업무에 빠삭하니 이렇게라도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지 자위하면서.
이런 사람들은 PI(Process Innovation)를 통해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자동화를 구현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산출물과 업무 프로세스, 노하우를 요청하면 선뜻 공유하지 못한다. 이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자동화를 통해 지금까지 내가 하는 업무량이 줄어 나의 존재감이 줄어들거나, 업무량 감소로 다른 업무에 대한 챌린지를 받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함께 회의를 해도, 본인이 기록한 회의록마저 내어 놓지 않는다. 본인 입장에서는 본인의 업무 영역을 보호하고, 이 회사에서의 나의 바운더리를 지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 태도이다. 조직간 사일로는 이렇듯 개인이 본인의 업무를 협업하는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지 않은데서부터 기인한다.
자연스럽게 손에 익은 업무들을 기획성 업무, 혁신성 업무로 과감하게 변환이 있어야 회사 뿐 아니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운영성 업무에서 내가 기획하고 주도하는 업무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늘도 업무로 머리가 복잡하다. 만년필과 몰스킨을 꺼내들어, 루틴하게 진행되는 내 업무 중에 혁신할 수 있는 업무는 없는지 종이에 그림을 그려보며 구조화 해 본다. 선뜻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면 오전에 구역장님이 보내준 QT 내용에 있는 성경 구절을 쓰거나, 밀O의 서재에서 어제 읽은 내용 중에 인상 깊은 문장을 찾아 쓴다. 우리가 키보드만 주로 사용하다 보니, 손글씨를 쓸 때 의외로 손이 쉽게 피로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끔 종이에 글을 써보면 세 줄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손글씨를 쓸 때 그동안 안 쓰는 근육이라 그런지 손목이 당기고 손가락이 금세 피로해져서, 나도 모르게 손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피로를 풀게 된다. 그러니까 손글씨도 노동인 셈이다. 눈으로는 읽고, 손으로는 쓰는 단순한 노동. 마음이 비워지고, 쓰는 일에만 집중하다 보면 무거웠던 마음, 불편했던 마음, 불안했던 마음,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 위에,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주도하지 않은 회의엔, 노트북이나 디지털 디바이스도 좋지만 가끔은 수첩과 펜을 챙겨간다. 회의 내용을 종이에 글로 질서정연하게 최대한 예쁜 필체로 필기하기도 하고, 회의에 집중하는 척 아무 의미 없는 낙서를 끼적이기도 한다. 낙서를 쓰거나 의미없는 도형을 그리고 있으면 그 시간조차도 나름 힐링 타임이 되기도 한다. 남들은 내가 회의에 무척이나 집중하는지 알겠지만. (사실 집중합니다. 저는 한 번에 두가지를 잘하거든요.)
하루 5분 정도 할애해서, 좋아하는 문장을 종이에 시간을 들여 써 보는 건 어떨까. 필체 연습에도 도움이 되고,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베끼면서 자연스레 글쓰기 연습이 될 수도 있다. 필체가 예뻐지면 더 쓰고 싶어지는 선순환도 있고, 머리가 가벼워지는 건 덤이다.
그렇게 필사한 글들을 SNS에 올려 남들에게 자랑해도 좋다.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면 이 루틴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되니까.
컨퍼런스에 왔다. 사은품이 눈에 띈다.
문구는 따로 사지 않고, 이럴 때 모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