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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살자고

캐치프레이즈만 남아 : 글쓰기

by 꼬르따도

IT 회사에 있을 때는 글쓰기가 굉장히 큰 역량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내가 만든 서비스를 효과적이고 컴팩트하게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의 영역이고, 릴리즈한 서비스를 실제 기능보다 더 부풀려 그럴 듯 하게 세일즈 포인트를 잡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래서 개발자들이 글쓰기 소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IT 회사의 마케터들은 대부분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회사 소개 자료나 블로그, 테크 데이에는 Technical Writer들의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 글쓰기 강의를 종종 열었고, 내부 직원 중 마케터들이나, Technical Writer들이 글쓰기 소모임을 이끄는 경우가 많았다.


전 직장인 IT회사에서는 인당 동아리 활동비가 5만원씩 지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각종 동아리에 가입을 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팀 주니어들도 '아, 나도 클라이밍 동아리 하나 만들어볼까', 우리 팀 리더도 '나는 엘피바에서 음악 들으며 술 한잔 하는게 그렇게 좋더라, 그런 동아리 하나 있으면 가입할텐데' 같은 본인들의 희망사항들을 말을 했다. 내가 몸 담았던 회사는 그룹사들 중 1.5tier 정도 되어 약간 메인 업무의 서브 역할하는 것에 다들 익숙한 듯 했다. 동아리 활동을 참여하는 것 조차도 약간 몸을 사리는 걸 보고서, '주도적으로 동아리를 만들고 운영하는 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살아있는 메시지를 팀원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극내향인이지만 동아리를 하나 만들어 운영을 했다.


당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감명깊게 봐서, HB클럽이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었다. 해당 드라마에서도 직원간 친밀감 형성과 회사 내 복지 일환으로 인사총무팀 주도하에 임직원 모두를 동아리에 가입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인간 관계를 노동으로 여기는, 삶에 지친 미정이는 아무 곳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인사총무팀 직원과의 면담을 통해, 그렇게 이도저도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인 해방 클럽에, 미정이도 등떠밀려 가입하게 된다. 드라마 내에 해방 클럽에서 회원들이 글을 쓰고 공유하고 삶을 나누며, 치유받고 자유를 찾아 가는 장면들이 나온다.


내가 만든 HB클럽도 드라마 속 해방클럽의 아류로 시작했다. HB는 해방의 약자이자, 지속 가능한 모임을 위해 혼밥의 의미를 추가했다. 혼자서 밥을 먹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관련 활동 일지를 카톡방에 올리는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혼자 밥을 먹고 뭐든 하면 되는 그런 모임이었다.


활동을 위해 회사 주변의 카페나 식당 몇 곳을 섭외해 활동비를 미리 걸어두고(선불제) 회원들이 자유롭게 출입하여 선불금을 차감해가며 활동할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대부분 내향인들이 주 참여자들이라 익명으로, 서로 만나지 않고, 비밀스레 활동하는 HB클럽 모임의 취지를 좋아했다. 요새 아이들이 좋아하는 느슨한 연결의 모임인 셈이다. 연결성은 가지고 싶지만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은, 느슨한 연결. 딱 내가 좋아하는 방향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회사의 어뷰징 이슈에 걸려, 동아리 모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최소 월 1회는 대면 모임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생겼다.


제대로 된 동아리의 형태를 갖추려면 회장, 부회장, 총무 등 그럴듯한 조직 체계를 갖춰야 하고, 함께 모였다는 회의록과 사진 등의 증빙이 필요했다. 문제는 동아리 회원들 모두 느슨한 연결을 선호하는 극내향인들 뿐이라 부회장, 총무를 하겠다고 나서는 인원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모임을 가져도 진행이 뜨듯미지근 했고 다들 낯을 가렸다. 참여율도 저조했다. 활발하던 모임은, 대면이라는 조건이 하나 붙고 나서부터는 금세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회원들 탈퇴로 유지가 어려워져, (내 역량 부족도 있고) 8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동아리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HB클럽을 운영하며 남은 건, ‘다 먹고 살자고’ 캐치프레이즈가 새겨진 키링 하나 뿐이다. 다른 회사로 옮긴 지금도 그 키링은 아직도 내 가방에 달랑 달랑 붙어있다.


얼마전 HB 클럽의 회원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내가 회사를 떠난 걸 뒤늦게 알고, 회장님 어디 가셨냐고, 언제 우리가 약속했던 국밥회동 해야 하지 않냐며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그러자고 회신을 보냈지만, 극내향인들 답게 처음에는 의욕을 보이지만, 모임까지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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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조회사의 전략기획팀에서 회사 생활의 70% 이상을 보냈다. 대기업의 기획팀에서 하는 일이라는게 대부분 임원들의 가려운 부분들을 긁어주는 보고서를 만들고, 현업 부서에 데이터를 요청하고 취합하여 가공하는 일이 전부다. 이것도 능력이면 능력이겠지만, 사실 개발자들이나 디자이너처럼 개별적으로 홀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류의 일은 아니다. 전문 분야로 보기엔 한계가 있다.


내가 이 회사를 떠나 다른 회사로 간다고 가정했을 때, 내 보고서 작성능력이 그곳에서도 통할지는 미지수다. 내가 임원에게 직접 보고하고, 회사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어 마치 이곳에선 중요한 인물이 된 듯한 착각이 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신기루일 뿐이다. 회사의 상황에 따라 제일 먼저 짤라야 하는 인원이 있다면, 기획팀 인원부터 물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나마 회사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획실 내 IT 업무로 롤을 옮겼다.


실제로, 나는 자동차 부품사 대기업 기획팀에 있다가 IT 회사를 거쳐, 다시 자동차 부품사 중견기업으로 옮겼다. 회사가 크면, 지원부서의 역할도 세분화되어 있어 기획 업무도 M&A, 과제 심의, 프로세스, 업무 효율화, 기업전시나 홍보, IT 등 나름 전문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중견기업에선 개발과 영업이 우선이라, 기획 업무가 뒷전인 듯한 인상을 받는다. 혼자서 여러 업무들을 커버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팀에 다른 팀원들은 R&D 프로세스 업무에 전문성이 있어, 이 회사가 아니더라도 컨설팅 회사에서도 생존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가끔은 그래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고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세스에 IT 도구를 다루는 것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한 역량이 되겠지. 그런 사람들은 다 이직을 했다.


이럴 때, 내게 필요한 건 그들과 다른 역량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동안의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비정형 데이터들을 구조화하여 프로세스를 표준화하거나, 보고서 작성 경험을 되살려, 내가 하는 업무들을 글로 쓰고 어필하는 것이다. 나는 알앤디 IT 업무 및 도구 사용 방법 등을 Attlasian사의 Confluence 툴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업로드했다.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겠지만 꾸준하게 업로드했더니 어느 날 입소문을 탔는지 조회 수가 늘기 시작했다.


물론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 각종 밈과 재밌는 입담으로 어그로를 끈 것도 있지만, 이렇게 어그로를 끄는 것도 능력이다.


사실, 우리가 의미 없이 회사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 모두 나의 자산이 될 수 있다.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뭐든 배워두면 좋다. 언젠가 쓰일 날이 온다.


IT 회사에서 글쓰기 강연이 있으면 꼬박꼬박 참여하고, 회사 공식 블로그나, 마케팅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외부에 오픈한 홈페이지 글도 놓치지 않고 꼼곰하게 읽었다. 그리고 직원들 중에 책을 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쓴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저자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그것까진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회사에서 하는 서비스들을 어떻게 외부에 PR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는지, 일상에서 어떻게 영감을 얻고 사용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얻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일하는 방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의 중견 기업으로 이직을 한 이후, IT회사에서의 2년 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하는 업무들을 효과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Confluence에 꾸준히 글을 올렸다. 물론, 친분이 있는 IT 조직의 힘을 빌려 그룹웨어 배너에 바로가기를 연결해서 홍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입소문을 통해 잔잔하게 우리 팀에서 내부 임직원들에게 지원하는 영역들이 홍보가 되기를 바랬다. R&D IT 영역에서 신규 업무 툴들을 도입하고, 전파하는 역할, 그리고 내부 ALM이 어떻게 개선되고 있는지, PLM은 어떤 방향성으로 PI가 진행되고 있는지. 지금까지 꾸준하게 조회수는 증가하고 있으나, 주로 주니어들이 읽고 자기들끼리 전파하는 수준인 듯 하다. 3개월만 더 이렇게 운영하고 안되면 강제로 입에 떠먹여 주는 수단을 고려해봐야지. 아 입벌려, 정보 들어간다.


그리고, 저녁 퇴근 이후 시간을 할애해 논문을 꾸준히 쓰고 있다. 1960년대 구소련에서 특허 심사 업무를 담당하던 겐리히 알츠슈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십만건의 특허를 심사하다보니, 발명에는 공통되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TRIZ라는 발명을 쉽게 할 수 있는 기법을 고안했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만든 기법을 사용하다보면 보통 사람들도 쉽게 발명을 할 수 있는 기법을 고안한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제조회사 기획실에 있으면서 각종 논문들을 접수하고 분석했더니, SCI 등재된 심도 깊은 논문이 아니라 저널 수준의 논문의 경우엔 몇가지 패턴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 패턴 중 쉽게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두 가지 신기술을 결합하여 회사 업무에 적용해 보는 방법이다. (저널 수준의 논문은 신기술 리서치 수준도 등록이 된다. 그걸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있으면 더 좋지.) 두가지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각각 2페이지씩 기술하고, 마지막 두가지 신기술을 결합하여 시스템에 반영하는 설계를 2페이지, 그리고 결론을 내면 된다. 이렇게 하면 6~10페이지 내외의 논문 하나를 뚝딱 쓸 수 있다. 구현까지는 하지 않고, 설계 수준의 논문이고, 실험은 챗gpt의 결과로 대신했다. 실제로 작년 학회에 발표했던 논문은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완성하는데까지 딱 2주가 걸렸다. 평소 고민했던 분야라 쉽게 쓸 수 있었다고 포장 좀 했다.


비슷한 방법으로 올해도 상반기 학회에 제출할 용도로 퇴근하고, 한두시간씩 할애해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60% 완성했고, 이번 달 말까지 완성할 수 있을 듯 하다.


논문을 쓴다는게 크게 내 커리어나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했던 업무를 기반으로 산출물을 하나씩 만드는데 의미를 둔다. 내 회사 생활이 무의미한 생활이 아니었구나 스스로 위안도 되고, 학회 참석을 위해 공기 좋은 곳에 가는 건 건조한 회사생활에 한줄기 오아시스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 명분이 있다면, 나중에 내 자녀들이 대학에서 연구를 하다 디비피아(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아빠가 했던, 조악한 연구 논문을 보고 용기를 얻어도 좋고, 아빠가 나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구나 하고 자극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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