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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용소보다는 나으니까

나를 가꾸는 마음 : 미백치약, 주블리아

by 꼬르따도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운동하고 나를 가꾸는 곳이기도 하다. 눈치 챘겠지만, 이 글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회사에서 하는 일과 회사라는 공간의 범위를 점점 넓혀가는 것에 있다. 회사는 맛집이자, 취미 공간이고, 헬스장이자, 미용실이다. 매주 목요일 점심에 러닝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목요일은 일터가 헬스장으로 변한다. 매일 잠깐이지만 10분간 정성껏 손글씨를 쓴다면,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미술학원일 수도 있고.


어느날 출근길에 장영란 유튜브 채널을 봤는데, 엘O생활건강의 미백치약을 홍보하고 있었다. 네고왕 출신 장영란의 세일즈 능력은 과연 효과가 있었고, 엘O생활건강 개발진의 진심에 현혹되어, 그걸 보자마자 미백치약 한 박스를 회사로 주문했다. 그래서 미백치약의 효과가 있었냐 하면 그건 답변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백치약을 사용할 때마다 내가 나 자신을 가꾼다, 나에게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조금은 들긴 한다. 사실, 미백치약의 효과보다 이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 내가 나 자신을 가꾸기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것. 양치 시간이 단 3분 뿐이지만, 그 시간만이라도 나를 돌본다는 자세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그 일을 하는 내 자신을 좀 더 존중하게 만들고, 충실하게까지 한다.


이게 논리적 비약 같지만, 진짜 그런 마음이 조금씩 스며 들더라. 나를 아끼기 시작하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회사에 앉아 있는 시간에 회사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려고 노력하고, 그 시간만큼 나도 성장하려고 한다. 그리고 노력하는 내 자신을 소중하게 돌보게 된다. 이건 그러니까 선순환인 셈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년에는 직장 생활 17년만에 처음으로 논문을 한 편 쓰고 학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올 해도 논문 초록은 작성했다. 춘계 학회에도 제출할 생각이다.


나는 35년전에 자전거를 타다 벽에 부딪혀 발톱이 부러졌던 경험이 있다. 당시 그야말로 벽지 시골에 살았는데, 하나뿐인 의료시설인 보건소의 의사 선생님이 군의관이셨다. 지금도 그게 맞는 치료법인지 의문이 남는데, 이런 상태면 곧 감염된다고 엄지발가락에 마취 주사를 놓더니, 부러지고 남은 발톱을 뽑으시고 소독약을 바르셨다. 말도 못하게 아팠던 기억.


그리고 나서 10년 후 군대에서 군화를 신고 다녔더니, 엄지 발톱 절반에 무좀이 생겼다. 찾아보면 안다. 발톱 무좀이 얼마나 치료가 어려운지. 군 제대 후 그렇게 20여년이 지났는데 우연히 인스타에서 발톱전문무좀치료 병원 광고를 보고, 단 돈 9900원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치료를 시작했다. 세상에 그런 병원도 있더라. 코디네이터가 와서 발톱을 보고서 '어머나 몇 년 되셨어요?' 이 치료는 실손보험이 됩니다. 최소 1년은 치료를 받아야 완치가 됩니다. 하면서 언제까지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 할 지 로드맵을 알려준다. 의사 선생님은 잠깐 발톱 상태를 보고 치료 방법과 약 처방을 해준다. 모든게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시스템. 물론 약제비 포함한 치료비는 단 돈 9900원이 아닌 15만원이 나왔고 보험비로 10만원을 돌려받았다.


아내는 발톱 무좀 전문 치료 병원에 스스로 찾아 간 나를 보더니, 내가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본인을 돌보기 시작했다고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사실, 발톱 무좀 쯤이야 미관에 안 좋은 거 뿐이지 살아가는 데 전혀 불편하지도 않고 내가 문제 삼지 않으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껏 치료의 대상이 될 꺼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요새는 미백치약으로 양치를 하는 기분으로, 매일 밤 병원에서 처방 받은 무좀 치료약을 발톱에 바르면서 힐링을 한다. 이게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으니, 발톱에 약을 바르고 말리는 그 10분의 시간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시간은 아내가 집안일이나 육아를 내게 강요하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 즉, 의미 치료를 창시했다.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을 추적 관찰했더니, 본인을 아끼고 일상을 변함없이 수행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단다. 본인도 매일 아침 면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그러니까 내일의 삶이 불확실하더라도, 의미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오늘 현재를 충실하게 작은 일도 의미있게 보내는게 중요하다.


나는 소중하다. 그러니 내가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하는 회사라는 공간도 소중하고, 여기에서 내가 하는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소중하다. 이를 위해선 전제 조건인 나는 소중하다는 마음이 뿌리가 단단하고, 줄기가 풍성한 나무처럼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회사 업무에 나가 떨어져 번아웃이 온다거나, 관계에 싫증이 나서 모든 관계가 노동처럼 느껴지거나 하면, 나를 돌볼 여력이 없다. 나를 돌보고 내가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다정할 수 있다. 결국 다정도 에너지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사업계획 업무와 로드맵 수립, 과제/투자 심의 업무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이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 매일 새벽 2시가 넘어 퇴근을 했다. 판교 회사앞에서 그 시간에 택시를 잡으면 가까운 거리인 정자동은 다 승차거부를 한다. 어느날은 그렇게 택시를 대여섯대 흘려 보내고, 혼자서 결국 밤길을 한시간 넘게 걸어서, 집에서 대충 자고 씻고 바로 회사로 나온 기억도 있다. 그렇게 일이 몰리면, 회사가 나를 억까하는 기분마저 든다. 다들 나를 이용하고 있구나 하는 망상에까지 빠져, 다른 사람들이 문의를 하거나 일을 요청할라 치면, '나 바쁜거 안보여요. 알아서 하세요!'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망가져 버린 관계도 있다. "이거 니가 하면 되는데, 왜 매번 내 손을 타게해. 너는 책임소재에서 자유로우려고 하는 거잖아. 참 편하게 일한다." 여유가 없으니 다정함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닥터유(맞다 오리온에 닥터유 시리즈를 만든 의사쌤이다.) 아저씨는 모든 건강 콘텐츠(내과, 외과, 신경과, 정신과 포함 모든 장르)를 다루는데, 늘 치료훈련에 뒤따르는 말이, 본인이 사용하는 총 에너지의 10%는 남겨둬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무리다 싶으면, 거기서 그만 두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늘 강조한다. 그러니, 업무가 과중하다 하면 지체하지 말고, 재빨리 리더에게 본인이 쏟은 리소스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업무량 배분을 요청해야 한다. 견디는게 능사가 아니란 말이다. 회사 사정이나 팀 사정이 어떻든, 그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정도 고생했으면 팀원 누구나 당신의 노고를 인정한다. 거리낌 없이 해야 할 말은 삼키지 말고 논리정연하게 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대신 감정을 섞어서는 안된다. 내가 여유가 있어야 다른 팀원들의 사정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다정히 선의를 베풀 수 있다.


미백치약에서 시작해 나를 돌보는 것까지 연결이 되었는데, 단순하지만 빅터 프랭클이 나치 치하 수용소에서 매일 면도를 한 것처럼, 양치를 할 때마다 오늘을 충실히 보내자 하는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다잡는다. 그래도 회사가 수용소보다는 나으니까, 나를 가꾸기엔 훨씬 나은 환경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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