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요새는 헤르만 헤세의 글들을 읽고 있다. 그리고 김말봉의 소설을 읽고 있다. 김말봉의 소설은 일제강점기 전후에 쓰여진 통속 소설인데, K-막장 드라마의 원조로 불릴 만큼 자극적이고 재미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김말봉 여사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여자 장로란 점이다. 그녀의 사생활 이슈와는 별개로, 지식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꽤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 여성 인권을 위해 사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잠시 절필을 하였다. 김말봉 소설은 나중에 또 자세히 얘기해 보겠다. 당시 종교계가 사람을 품는데 지금보다 더 유연했던 듯 하다.
지금,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읽는다는 사실은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그의 대표 소설 데미안도 읽어 보지 않았지만 그가 쓴 산문들을 먼저 읽고 있다. 그의 글들이 지금 시대에도 적용되는게 꽤 있더라. 김말봉 소설이 배경 지식을 지우고, 스토리만 놓고 보면 남녀관계의 치정관계가 지금 봐도 흥미진진 트랜디 한 것 처럼, 헤세의 글도 현재 상대적 박탈감으로 여러모로 FOMO를 겪고 있는 내게 법륜 스님의 한 말씀처럼 큰 도움이 된다. 그들의 글이 시간이 지났지만 빛이 바래지 않고, 아직 생생히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헤세의 글 중 마음에 와닿은 건, 이를 테면, 소음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연과 벗을 하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소외가 두려워서 최신의 정보들을 쫓길 바빴나 보다. 헤세 형님이 전한 조언 중에 최신 나온 신간들을 바로 읽지 말고, 시간을 두고 읽어도 괜찮다,가 있다. 사람들과 공감대 형성을 위해 재빠르게 트랜드를 쫓지 말고 여유를 두고 그 시간에 나무를 한 번 더 들여다 봐라, 하늘을 한 번 더 봐라, 라고 한다. 사람들과 잠시 잠깐 공감대 형성이 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더라,고 한다. 그것보다 이너피스를 위해 자연을 즐기는 여유가 더 중요하다면서. 지금이나 예나 사람들의 마음이 분주했다는 사실이, 그들과 내가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도감을 준다. 나도 자연과 조금 더 벗하고 싶다. 오늘은 마음이 몹시 분주하기에.
마음이 분주한 것 중 하나는,
회사 경영 실적이 갈수록 나빠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회사에 비해 성과급이 턱없이 부족해 연초부터 회사 분위기가 초상집이다.
상대적 박탈감, 이게 나를 괴롭힌다.
내가 회사 생활의 끝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회사가 최선의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는지
팀에서 내가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부당한게 사실이라고 내심 생각은 하고 있지만, 작년에는 안 그런 회사가 어디있냐, 사람 사는데 공평을 찾지 말자, 하고 애써 웃어 넘겼다면 지금은 웃어 넘겨야 하는 페이지로 예전처럼 쉬이 넘어가지가 않고 턱하니 목구멍에 걸려있다. 속상하고 괴롭다.
회사 사정도 나쁜데, 내가 원래 하기로 했던 일을 포기하고 지금 이 팀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나 희생을 했는데, 평가가 이게 뭐야. 그럴 듯한 호언장담으로 사람을 속여가지고 다른 일들을 맡겼으면 그에 따른 보상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누구 시간은 땅을 파서 나오나.
마음속으로 내심, 고과가 A가 나오지 않으면 속상하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연말 평가 사이트 화면에 진짜 A가 아닌 B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으니까
말그대로 짜증이 밀려왔다.
사실, 팀 내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내가 맡은 일 이상의 업무도 자진해서 하고, 팀장 대행도 3개월이나 하고, 남들 지켜야 할 Rule을 어긴 사실을 알아도 모른 척 했는데. 나 말고 A 받을 사람 누가 있냐 두루두루 눈을 돌려봐다 없었는데.
이 일들이 실제 겪은 경험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팀장과 다른 팀원들이 담합한 것도 실망스럽다. 담합이란 말은 그들에게 남들 몰래 특혜를 준 것이다. 특혜라는 표현은 다른 이들이 알면 안되는 혜택일 뿐 아니라 팀에서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혜택이기 때문에 이 표현을 사용했다. 물론 그들의 일이 더 어렵고 중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출발선은 같아야 그 난이도라는게 납득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혼란스럽다. 나는 도로 내가 하기로 한 일들을 하기 위해, 본래의 팀으로 돌아가야 할까. 회사의 필요에 의해 TFT로 넘어와서 다른 업무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다시 원래 조직으로 돌아가야 할까.
그냥 여기서 남들처럼 같은 특혜를 누리면서 편하게 회사생활을 할까. 자존심만 버리면 못할게 뭐가 있을까.
특별히 작년에는 내 나름 많은 일들을 했기에 실망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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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일단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예정이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된다. 비교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헤르만 헤세 형이 자꾸 그렇게 내게 말을 건다. 고민할 시간에 하늘을 한 번 더 보고, 나무를 한 번 더 쳐다보라고. 일단 헤세 형님의 인사이트가 그럴 듯하니 가만히 있어볼 요량이다. 하늘 한 번 보고 나무 한 번 보고 하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냥 예처럼 웃으면서.
그리고 나서 일이 어떻게 풀렸는지 이에 대해 한 달 후 기술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