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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푸른하늘 Sep 16. 2024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연주 - 환상에서 실재로

빛과 그림자가 춤추는 초현실적인 밤의 울림


2024년 9월 8일 마르크-앙드레 아믈랭 독주회

슈만 숲속의 정경, 라벨 밤의 가스파르,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아믈랭의 손끝이 밤의 소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마다 음은 마치 차가운 물의 표면을 조용히 깨는 물방울처럼 퍼져 나간다.

이어 소리의 파동은 벽을 만나 다시 나에게 돌아오며, 나는 그 진동의 순환을 온몸으로 느낀다.

공간의 표면을 문지르는 음들이, 내가 아닌 소리 자체가 이제는 이 방을 지배하는 주체가 된다.

그 소리는 마치 깊은 숲 속에서 날아오는 예언의 새소리 같고, 동시에 밤의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달빛처럼 명징하다.

나는 그 소리와 하나가 되어 숲의 깊은 곳, 밤의 신비한 강물, 그리고 시간의 경계를 넘나 든다.


그의 손끝에서, 피아노는 기계적인 도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변모하고 음들은 단지 소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와 감정을 지닌 생명체로서 공간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그 한 음에서 시작되고 그 소리의 파동에 실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 채 나는 이미 그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음과 나, 우리는 이 넓고 텅 빈 공간에서 유일한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피아노 연주를 듣다 보면 어떤 연주자는 연주 속에 자신은 사라지고 음악만이 살아 숨 쉬는 연주를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연주자는 음악자체보다는 피아노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연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이날의 공연은 어디에 서 있을까? 과연 아믈랭은 ??

아믈랭은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는 현실과,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의 경계에 선 공연을 펼쳐 보였다.

현실과 초현실의 대립 속에서 융합된 부조화의 완벽한 조화.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펼쳐 보인 것이다.


그는 인상주의의 걸작 라벨 밤의 가스파르, 그리고 낭만주의 피아노의 걸작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

둘의 경계에 선 슈만의 숲속의 정경. 이 세곡으로 이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슈만의 숲속의 정경, 라벨 밤의 가스파르, 이 두곡은 문학적 시상을 회화적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라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역으로 감상자에게 음악이라는 가장 비언어적인 추상적 예술을 감상자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과 이미지로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전달해내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의 "이제 우리는  낭만주의적인 것들, 슈만과 리스트가 씨앗을 뿌려놓은 것들을 거둬들여야 한다. 거기에는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움, 환상도 있지만, 과한 감정, 흔들리는 템포, 지나친 아르페지오와 페달도 있다"는 말처럼 풍부한 표현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과잉과 복잡성을 줄이고 음악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균형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에 연주자는 직면한다.


그렇다면 아믈랭은 왜 이 3곡을 그것도 슈만을 맨 앞에 배치하고 다음에 라벨, 이후 슈베르트로 연주를 마쳤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아믈랭이 슈만의 곡을 연주한 후, 라벨과 슈베르트의 작품을 연주한 배치는 깊은 음악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슈만의 숲속의 정경은 낭만주의의 경계의 작품이다.

당시 독일 시인들이 노래한 숲과 사냥에 대한 작품의 문학적 서사에서 영감을 얻은 숲속의 정경은 낭만주의적 감정의 과잉, 환상, 그리고 정신분열로 불안한 내적 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미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미묘한 터치, 감정의 흐릿한 윤곽선이 스며들어 있다. 숲의 이미지와 예언의 새는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감각과 이미지를 통해 음악을 풀어나간다. 과연 이 작품이 1849년 낭만주의 작품인가 싶기도 하고 50년 뒤의 인상주의 작품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슈만은 낭만주의의 정수를 표현하면서도, 소리로 심상의 순간들을 그려내며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 지점에서 아믈랭의 슈만 해석과 선곡은 그가 이 곡을 경계로 두고,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대립을 명확하게 의도한 것처럼 보이며 슈만의 음악은 두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그 사이에 위치한 ‘경계’가 된다.

슈만을 통하여 연주자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경계를 음악적으로 명확히 드러내면서, 그 사이에 감춰진 미묘한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제 어둠이 내려앉은 홀, 아무것도 없는 공간, 덩그러니 홀로 놓인 피아노 앞, 시간은 멈추고 모든 것이 정적 속에 묻혔다.

숨마저 고요에 잠겨 나는 기다린다.

아믈랭은 천천히 등장한다.  그의 걸음은 소리 없이 무대를 가로지르고, 나의 모든 감각이 그의 움직임에 집중된다.

피아노 앞에 앉는 그의 모습은 정적 속에서 다가올 첫 순간을 예고한다.  


첫음이 울린다.

차가운 공기의 표면을 깨뜨리며 유리 조각처럼 울려 나오는 첫 음.

단 하나의 음이지만, 그 무게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우주 속에서 소립자가 터져 나가는 순간처럼 퍼져나간다.

음은 나를 둘러싼 물결이 되어, 보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벽을 타고 흐르고 나는 그 중심에 선다.


아믈랭의 손이 피아노 위에 닿는 순간, 숲의 신비로운 입구가 열렸다.

나는 어둡고 깊은 숲의 미로에 들어선 것 같다. 숲은 나를 환영하지도, 두려워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 안에 들어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나 자신을 잃어버린 듯하고, 나무들 사이로 들려오는 새의 노랫소리는 길을 잃은 나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나는 여전히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


7곡 예언의 새의 순간의 음표와 선율은 숲속을 휘감는 신비로운 기운으로 변하여 들리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빛과 그림자의 흔들림으로 느껴졌다. 소리는 구체적인 묘사에서 점차 멀어지며, 숲 속의 새소리, 나뭇잎의 속삭임, 바람의 흐름은 무형의 이미지로 공간을 채운다. 나는 이 소리의 숲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그저 그곳에서 미로처럼 이어지는 음의 길을 따라간다.



두 번째 라벨의 곡이 시작되자, 나는 더 깊은 밤의 꿈으로 빨려 들어간다.  

물의 요정 옹딘의 첫 음, 유혹의 음이 울릴 때, 물속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여운처럼, 공기마저도 음에 녹아 흐린 안개가 되고,  음들은 내 안에 있는 숨겨진 욕망과 두려움을 조심스레 끌어낸다.  

연주자는 검은 바다 한가운데 나를 던져 넣는다. 음들이 물방울처럼 반짝이며 떨어질 때, 나는 그 차가운 표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더 깊이 가라앉아 물이 차가울수록 그 안에서 숨 쉬는 나의 생명은 더 뜨겁고 강렬하다.


이어지는 곡에서 나는 서늘한 저녁의 황혼 속, 어딘가 멀리 보이는 교수대 앞에 서 있다.

바람은 거의 멈췄고,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알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내 가슴을 짓누른다.

아믈랭은 이 묘한 침묵과 음울한 공기를 한 음 한 음으로, 단조로운 반복의 끝없는 운명처럼 그려낸다.

그 반복되는 종소리 같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며 내 귀에 잔잔히 울린다. 나는 그 끊임없는 종소리에 얼어붙은 듯하다.

음들은 나에게 고독을 강요하고, 그 음들은 죽음의 그림자처럼 내 머리 위를 떠다닌다.

어둠 속 교수대에 길게 축 쳐져 매달린 그림자가 내게로 다가오는 듯, 공포와 체념이 뒤섞인 감정 속에 나는 눌려있다.

여기에는 감정의 폭발이 없다. 오직 냉혹한 현실과 그 무게만이 내 어깨를 짓누를 뿐이다.

그의 연주는 차갑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단호하게 느끼게 한다


아믈랭은 라벨에서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며, 감정적 과잉 대신 정밀한 음향의 조화에 초점을 맞추어 연주한다

그가 연주한 라벨은 멜로디를 넘어서, 울림 중심의 화성과 소리의 색채로 가득 차 있다.

특히나 밤의 가스파르는 인상주의의 본질을 음악적 언어로 번역한 걸작으로 인상주의의 관능적 색채와 감각적 이미지를 섬세하게 녹여내어, 청중에게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그가 창조한 음향은 단순한 소리의 나열을 넘어, 감각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며, 각 음표는 하나의 색채로 변환시켜, 입체적인 그림을 완성한다.

이렇게 그의 손끝에서 음악은 매 순간이 고스란히 하나의 생생한 회화적 장면으로 변모한다.

음향은 빛의 명멸을 반영하며, 소리의 색조가 연주되는 공간 속에서 춤추는 그림처럼 나타난다.


2부, 이날의 마지막곡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아믈랭은 이곡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낭만주의로 복귀시킨다.

슈베르트의 낭만주의는 슈만과는 다르게 더 고전적인 구조와 순수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감정의 과잉이나 환상적 요소가 아닌, 보다 절제되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깊은 감동을 전달하는데 이날 아믈랭의 연주는 완벽히 이것을 표현해 주었다.

그는 다시 나를 낭만주의의 원형적 감정으로 회귀하게 하여 감정과 구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순수 음악으로 나를 인도했다.


개인적으로 이날의 가장 기대한 연주고 아믈랭의 연주는 이미 음반으로 많이 즐기고 있지만 실연은 처음이라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역시나 너무나 황홀한 연주였다. 작년의 마리아 조앙 피레스 연주가 단지 섬세한 선율위주이고 구조적인 중층의 음을 만들지 못하여 실망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아믈랭은 완벽하게 음을 쌓아 올렸다. 때로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보다 더 단단하게 말이다.

그의 소리는 슈베르트가 설계한 음악적 건축물을 세밀하게 구현해 내어, 각 음이 하나의 벽돌처럼 제자리에 놓여 작품 전체가 하나의 웅장한 구조로 완성되는 과정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소나타 21번이 시작되자, 나는 마치 광대한 성당의 문턱을 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으며

음들은 연주회장의 높은 천장을 가득 채우며 공명하는 기둥과 벽 사이로 서서히 스며든다.

첫 악장은 서사적이고 넓은 공간을 펼쳐 보이며, 감정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쌓여가는 거대한 음향의 벽을 형성한다.

두 번째 악장은 나에게 고요하고 고요한 회랑에서의 사색을 상상하게 하며, 내면의 깊이를 탐구하는 듯한 음향을 제공하였으며,

마지막 절정의 순간에 이르러, 각 음이 마치 성당의 탑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공간을 가득 채우며 건축물은 완성된다.


그가 그려낸 슈베르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색과 고독이 층층이 쌓인 음악적 성찰의 대성당이다.

나는 그 웅장한 공간 속에 서서 음악의 성채 속에 잠겼으며, 음들 하나하나는 마치 대성당의 아치형 구조물처럼 나를 감싸고 올라가 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아믈랭의 손끝에서 21번 소나타는 건축적인 기념비처럼 서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감정과 사유의 순례자가 되었다.


이날의 아믈랭은 피아니스트가 아닌 음악 그 자체를 중심에 둔 연주자였다.

라벨 슈만에서는 빛과 환상을 담아내는 화가였고 슈베르트에서는 사색의 건축가였다.

그의 연주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며, 모든 음이 또렷하게 살아 움직인다.

음 하나하나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합하는 방식으로 울림을 만들어낸다.

음색은 가볍고 투명하지만, 강하고 중심이 잡힌 소리를 통해 섬세한 통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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