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블레하츠와 트리포노프 연주 속 무아지경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제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달력은 단 한 장만을 남겨두었고, 그마저도 곧 시간이 서두르듯 떨어져 나갈 것이다.
올해는 연주회장을 참 많이 찾았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었던 음악들은 어딘가 내 기억 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올해는 음악을 잘 모른다던 친구와 함께 연주회장을 꽤 자주 찾았다.
그런 날이면 공연이 끝난 뒤, 나는 열심히 내 감상을 주절주절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친구는 가끔 낯선 길 위에 불쑥 나타난 표지판처럼, 한 줄로 모든 걸 정리하곤 했다.
그 한줄평은 한옥의 툇마루에서 쬐는 겨울의 햇살처럼 따스하면서도, 때론 어딘가 서늘한 그림자를 품은 그런 반전의 느낌을 주는 평이었다.
그 한마디는 때로 내가 긴 문장으로도 잡아내지 못했던 연주의 본질을 단숨에 한 줄의 문학으로 온전히 그려냈다.
드뷔시의 영상은 “고요한 밤호수를 걸으며 미풍에 몸을 맡긴 느낌”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비올라 연주는 "“지나친 감상에 빠지지 않게 하는 적절한 애잔함"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지나간 사랑의 격정을 다시 떠올리는 노작가”
거쉬인의 Embraceable you를 듣고는 "개츠비의 데이지에 대한 사랑의 도취 내지는 희열"이라고 얘기했다.
이런 그의 섬세한 한줄평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문득 생각한다.
올해를 돌아볼 때도 친구의 말처럼 짧고 강렬한 한 문장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친구는 뭐라고 올해의 연주를 한 줄로 평할까?
그 문장은 어떤 풍경일까, 어떤 빛깔일까.
올해 많은 연주 중에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 무대가 있다.
그 선율들은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잇는 다리처럼 느껴지고,
나는 이제 그 순간들을 이렇게 글로 적어본다.
음악을 언어로 형용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무리라 말이 좀 안 되긴 하지만,
올해의 끝자락에서, 나를 하나의 선율로 이끌었던 그날의 기억을 따라간다.
연초에 만난 두 피아니스트, 블레하츠와 트리포노프의 연주.
그들의 연주는 서로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 두 개의 창문 같았다.
블레하츠가 ‘시간 속에 갇힌 춤추는 영혼’이라면, 트리포노프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블레하츠의 연주에서 여백은 음을 위한 명상의 공간이며, 침묵이 깃든 안식의 정원 같다.
음들 사이의 여백은 마치 고요한 알함브라 궁전의 중정처럼, 바람 한 점 없이 안개 낀 새벽의 숲처럼 고요하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숨 쉬는 정적, 음악이 멈춘 순간조차 살아 숨 쉬는 그 고요 속에서 청중은 마음속 내면에 숨겨진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반면, 트리포노프의 여백은 음을 위한 발판이며 격정의 쉼표이다.
그것은 폭풍이 몰아친 뒤의 잠깐 멈춘 바다, 숨을 고르는 찰나의 정적이다.
다시 에너지가 응축되어 곧 터져 나올 소리를 위한 긴장의 공간이며,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폭발 직전의 순간을 닮았다.
그 여백에는 불같은 에너지와 긴장감이 맴돌며, 다음 순간에 펼쳐질 알 수 없는 서사의 비밀을 은밀히 품고 있다.
블레하츠, 쇼팽의 왈츠 7번을 들어보자. 그가 연주는 '슬픔의 왈츠'라 불릴만하다
그의 소리는 소리와 침묵의 경계에서 조용히 존재를 드러낸다.
그 연주는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명상의 무아지경을 만들어내며, 친구의 말처럼 담백하고 정제된 연주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미로처럼 감춰진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음들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탐구하듯 섬세하며, 그의 쇼팽은 감정의 격정을 외치지 대신 오히려 고요한 작은 웅덩이처럼 그 안에 슬픔을 가라앉힌다.
우리 모두는 그 슬픔 속으로 조용히 발을 담갔다가,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돌아서게 된다.
블레하츠가 연주하는 이 곡은 '슬픔이 춤이 되는 순간'의 음악이다.
그는 이 왈츠를 단순히 경쾌한 스텝의 모음이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슬픔이 고요히 깃든 '숨죽인 춤'으로 만들어낸다.
그의 손끝에서, 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촛불처럼 떨리다가 곧 다시 힘을 내어 타오르려 한다.
그러나 그 불빛은 끝내 사그라들 듯한 불안감을 품고 있다.
그의 피아노의 터치는 섬세하고 투명하며 첫 부분의 단조로운 선율은 마치 한숨처럼 느껴진다.
왈츠의 선율에 맞춰 추지만 이 춤은 환희와는 거리가 멀다.
그 연주는 과거를 떠올리며 홀로 추는 춤처럼, 방 안을 배회하는 그림자의 발자국 같은 고독을 품고 있다.
왈츠의 리듬 속에서 그는 아련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고독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중간 부분의 활기를 띤 선율은 한순간의 위안을 담고 있지만 그마저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블레하츠는 "시간 속에 갇힌 춤추는 영혼"이다.
음악은 원을 그리며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지만, 그 원 안에는 이전보다 더 짙어진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의 연주는 소리 사이의 여백에서 생명을 얻는다.
소리가 멈춘 순간에도 그의 연주는 떠도는 메아리처럼 잔잔히 공간을 채운다.
마치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
그의 연주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 속에 잠든 잃어버린 시간과 감정들이다.
블레하츠의 쇼팽 왈츠 No. 7 Op. 64-2
https://www.youtube.com/watch?v=WRMI5VsbI64
블레하츠의 드뷔시 달빛 Clair De Lune
https://www.youtube.com/watch?v=A_NHZEb0QCw
이와는 반대로, 트리포노프의 연주는 화려하게 밖으로 터져 나오는 에너지의 무아지경이다.
그가 연주하는 쇼팽 즉흥환상곡 Op.66을 듣고 있으면 쇼팽의 "화려한 격정의 초상"이 떠오른다.
그의 손길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생동감 넘치고 음표들은 자유로운 춤을 추며 공기를 가득 채운다.
그이 연주는 모든 것을 삼킬 듯, 태양의 불꽃같은 강렬한 빛으로 청중에게 다가온다.
트리포노프는 자신의 감정을 과감히 드러내며, 청중과 감각적이고도 강렬한 대화를 나눈다.
그의 손끝에서 울리는 음은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고,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공간을 떠돈다.
첫 음이 울리는 순간부터 쏟아져 내리는 금빛 폭포 같은 빠르고 유려한 패시지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춤과 같다.
그는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서 이어지는 끊임없는 대화로 감정의 숨결이 느껴지고,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오는 클라이맥스에서는 그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순간을 맞는다.
이어지는 중간의 서정적인 부분에 이르면, 그는 화려함의 강렬한 빛을 잠시 거두고, 음악 속에 숨겨진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서정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처럼 깊고 맑다.
그러나 그 고요마저도 그는 긴장감을 품고 있다.
곧이어 다시 펼쳐지는 화려한 전개는 곧 그 고요의 바다를 삼켜버리고, 청중은 또다시 화려한 은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듯 트리포노프의 화려함은 곧 감정과 서사의 불꽃으로 승화되어 청중의 마음 깊은 곳에 잊히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
다닐 트리포노프 쇼팽 즉흥 환상곡 Op.66
https://www.youtube.com/watch?v=Gy5UHK4EeM8
침묵 속에서 속삭이는 명상가이고 어둠 속의 별빛인 블레하츠.
폭발적 생명력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자 불타는 태양인 트리포노프.
이렇게 두 연주자의 음악은 나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무아의 경계에서 형체 없는 빛이 되어 나를 새로운 차원으로 데려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