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사페카 살로넨 & 뉴욕 필하모닉 내한공연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과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음반을 함께 들여다본다.
소리에 생명이 있다면, 이날 그것은 분명 살아 움직였다.
엣지(edge)란 단어를 단지 물리적인 경계의 날카로움을 넘어서, 감각과 정체성의 선명함을 뜻하는 말로 확장해서 사용한다면, 이날 살로넨의 연주는 그 의미의 정점에 있었다.
연주(엣지)는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안정된 질서와 혼돈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거기엔 언제나 긴장감이 흐르고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하고 한 걸음만 내디뎌도 낭떠러지일 수 있는 곳, 그곳에서는 새로운 시선과 각성이 일어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날의 연주는 조금은 위태위태하지만 낯선 아름다움이 일어났다.
각 악기의 소리가 뭉개지지 않고, 날카로운 선을 가지고 살아 있었다.
조각칼처럼 섬세하게 단호하게 세계를 깎아내는 감각의 연주 속에 모든 악기는 자신만의 윤곽을 지녔고, 그 소리들은 톱니바퀴처럼 예리하게 맞물려 하나의 입체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1부 드뷔시 바다(La Mer)는 빛과 파도, 바람의 숨결까지도 소리로 표현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바다’에서는 빛과 물의 흐름, 깊이와 질감, 파도와 바람의 호흡까지도 관현악의 말로 다 담아냈다.
소리결, 그 물살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이런 드뷔시에서 느낀 정밀한 감각의 파도가 채 가시기도 전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날카로운 정서의 돌풍처럼 휘몰아쳐왔다.
이것은 가장 살로넨다운 연주였으며 올해 오케스트라 연주 중 감히 최고의 연주라는 말을 망설임 없이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환상교향곡은 한 남자의 병적 사랑과 환각, 광기, 파괴적 감정을 음향 자체로 그린 낭만적 표제교향곡이다.
그래서 광기와 환상의 극적인 전개 속에 과감한 템포 변화, 색채적 오케스트레이션, 타악과 관악의 극적 대비를 어떻게 살려내는가에 따라 이곡의 연주스타일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살로넨의 3악장은 인상적이었다.
전원 풍경에서 클라리넷과 오보에가 서로를 향해 말 없는 대화를 나눴고, 그 사이의 침묵마저 음악의 일부였다. 그 두 목관들은 단순히 서정적인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주고받는 감정의 신호처럼 울렸다.
클라리넷과 오보에. 그들은 마치 언덕 너머 서로를 바라보며대화하는 두 영혼 같았다.
무대 앞 클라리넷은 한 줄기 바람처럼 다가오고, 객석 뒤 오보에는 멀리서 천천히 메아리치며 답했다. 침묵과 여운마저도 음악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모든 음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살로넨은 서정성을, 감정을 넘치게 드러내기보다 거리 두기를 통해 오히려 더 진하게 느끼게 한다.
4악장과 5악장에서 드러난 금관과 타악의 강렬함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금관을 과장된 영웅성으로 다루지 않고 무게 중심으로,잘 조율된 힘으로 다룬다.
금관은 시끄럽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리듬의 정확함과 충격의 타이밍을 철저히 계산한 듯이 들려온다.
그래서인지 브루크너처럼 무겁고 점층적인 금관보다는, 스트라빈스키나 베를리오즈처럼 색채가 다채롭고 민첩한 금관에 더 어울리는 지휘자 같다.
음반도 들어보면 확실히 이 작곡가들의 연주가 멋지다.
바로 리듬의 정확함과 충격의 타이밍을 철저히 계산한 금관악기들과 구조적 비트감과 음색의 다채로운 결로 타악기를 적극적으로 끌어낸다.
그래서 두 악장에서 리듬은 날카롭고 정밀했으며 공포는 강렬하고 직접적이었다.
저음의 현악기와 금관과 타악이 밀고 들어올 때, 나는 이미 광장의 중심에 서 있었고, 심장은 북소리에 박자를 맞춰 뛰었으며, 그 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내 몸을 향해 곧장 떨어졌다. 감정과 청각이 분리되지 않은 채 나는 음악 속에서 처형당했다.
그는 타악을 단지 효과가 아닌 구조와 호흡의 일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했다.
전체적으로 리듬 구조와 비트감이 또렷하며, 불필요한 느긋함이나 감정의 흐트러짐을 피한 가장 그 다운 연주였다.
이렇다 보니 그의 선율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노래하기보다는, 명료하게 말하는 듯한 선율이다.
살로넨은 음들을 수평으로만 배열한 것이 아니라, 음악전체를 마치 다면체처럼 입체적인 공간 속에 배치한 듯했다. 각 악기들이 갖는 소리결의 존재감이 개별적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살로넨의 지휘 아래에서는 절대로 튀지 않았다. 살아 있는 모서리들이 모여, 한 폭의 완결된 그림을 이루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타악기와 관악기를 부상시키면서 선명한 음색과 음향적 입체감을 중심으로 연주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현악기는 두텁고 견고한 배경으로 설계되어 들린다. 마치 전체 구조의 두터운 벽 같다.
그래서 현악기의 가냘프고 여린 선율, 흐느끼는 감정은 살로넨의 사운드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감정선도 그저 배경으로 물러나는 경우도 많아서 어떤 사람들은 '차갑다' ‘정이 덜 간다’고 한다.
오늘 라벨, 드뷔시에서 이주 전 메켈레의 파리오케스트라보다 색채감이 떨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현악기의 섬세한 정서가 상대적으로 덜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앙코르 곡 로엔그린 3막 전주곡도 관악이 강해서 상대적으로 바그너의 여린 선율은 묻혀서 들리고 마치 비제의 카르멘 서곡 같은 느낌의 곡이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연주는 오케스트라라는 존재가 얼마나 깊고 넓은 표현의 언어를 지닐 수 있는지를, 그 가능성을 지녔는지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통째로 증명해 보인 연주였다.
그 안에서 나는 파도도 되고, 바람도 되고, 광장 한가운데 놓인 단두대의 희생자도 되었다.
이렇게 나는, 음악의 칼날 위를 걸으며 리듬의 정밀함과 감정의 깊이를 동시에 체험하는 아주 드물고 위험한 밤을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실황 연주를 마치고 집에 와서 내가 즐기는 베를리오즈를 다시 꺼내본다.
바로 카라얀/베를린 필과 뮌쉬/파리오케스트라의 환상교향곡 연주다.
서로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두 해석.
하나는 통제된 질서의 미학이고 다른 하나는 생생한 광기의 절정이다.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이 '광인의 꿈'- 광기, 몽환, 환각, 파괴의 드라마였다면, 카라얀은 혼돈과 날것의 에너지보다는 음향의 선명함, 균형, 밀도, 특히 미장센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둔 잘 정리된 비극의 드라마를 들려준다.
카라얀 특유의, 오케스트라의 질감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통제되고 소리의 질감은 기막히게 조율된다.
늘 그렇듯 현악기군을 매우 두텁고 풍부하게 사용하여 베를리오즈가 원한 정신적 파열이나 음향의 틈 속의 광기를 보여주진 않는다. 대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찬 사운드가 흐른다.
관악기와 타악의 날카로움은 의도적으로 다듬어져 정제된 방식으로 들려온다.
그러다 보니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은 아주 잘 준비된 준비된 장엄한 처형 절차처럼 들린다.
그 장면에서 관악기, 타악기 소리뒤에 들려오는 정밀한 현악기 리듬은 떨어지는 단두대의 칼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너무나 죄수의 목을 정확하게 형장에서 베어내는 순간처럼 느껴져 오히려 더 섬뜩하게 들려온다. 가장 순음악적인 연주인 것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섬뜩하게 들린다.
5악장 마녀의 축제도 기괴함보다는 드라마틱한 종결부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카라얀의 연주는 정신적 혼돈, 광기보다는 구조적 통일성을 추구한다.
베를리오즈가 작품 안에 의도적으로 일관되지 않은 감정과 음향, 비현실적인 환각의 전이와 격정을 삽입했지만, 그 모든 것을 질서와 논리로 환원하여 낭만적으로 포장해서 들려준다.
한마디로 베를리오즈의 '미친 아름다움'보다는 카라얀식 교향적 드라마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식의 연주에서 그 음악자체의 아름다움은 극대화되어 울려온다.
카라얀 만큼 소리 자체의 아름다움과 입체적 균형미를 잘 드러낸 환상 교향곡도 드물 것이다..
이게 이 연주의 진짜 맛이다.. 환상, 광기, 파괴라는 수식어를 떼버리고 순수한 음들의 향연을 듣고 싶다면 단연코 추천하는 음반이자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반이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Bgagen1f2__CIQdkDpKYTJ3pwztZ8QRX&si=zmPw0O-ZEk2GbMDT
이와는 다른 결의 음반 하나는 샤를르 뮌쉬와 파리 관현악단의 연주이다.
프랑스적 화려한 색채와 낭만적 광기 사이에서 그는 절묘한 균형을 잡아낸다.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은 비극적 장엄함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환청과 추락으로 들린다.
관악기, 타악기, 그리고 현악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비이성적질주에 휘말리며 죽음을 향한 파열음을 토해낸다.
이어지는 5악장은, 뮌쉬의 불꽃같은 지휘 아래 광기의 축제로 폭발한다.
거칠고 환각적인 음향들이 춤추는 가운데, 중간에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조차 더는 경건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일그러진 신성의 메아리로 들려올 뿐이다.
이처럼 광기의 열기 속에서도 색채의 균형을 잃지 않은 연주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밝은 색채의 파리 오케스트라는 뮌쉬의 변화무쌍하고 감각적인 지휘에 이끌려 격정적이고 불균형한 표현조차 기꺼이 감수한다.
과감하고 격정적인 불균형을 기꺼이 수용하며, 감정선을 절제 없이 밀어붙이며 광기와 환각을 그대로 노출하는 연주, 그것이 바로 이 음반의 진면목이다.
https://youtu.be/hjnDnCOdQiE?si=KrHth8ILnMWoaK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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