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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황제, 철학자처럼 다가오다 – 폴 루이스

폴 루이스 & 라일란트/국립심포니

by 헬리오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과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음반을 함께 들여다본다.

황제 협주곡 연재중 1부 이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 연재 (11)


조용한 황제, 철학자처럼 다가오다 – 폴 루이스(Paul Lewis)의 베토벤 '황제'

폴루이스 & 라일란트/국립심포니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 멀리 떠나 피서를 떠나기엔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요즘, 오늘의 연주는 그런 내게 잠시나마 무더위를 식혀주는 여름날의 소낙비 같았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의외의 곳에서 시작됐다. 바로 ‘가성비’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인 '폴 루이스(Paul Lewis)'가 협연자로 나섰는데, 그가 전문적으로 천착해온 베토벤을 연주하는 무대임에도 티켓 가격은 놀랍도록 저렴했다.

어떻게 이렇게 가격이 매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운 행운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곳 예당을 피서지 삼아, 잠시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음악의 그늘 아래 머물기로 했다.

(연주가 끝난 후에는 팬 사인회도 있었는데 엄청난 관객이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연주 시에는 전 좌석 매진은 물론, 합창석까지 꽉 찼다. 이 정도 티켓팅 파워면 충분히 가격을 더 높게 매겼어도 됐을 텐데...)


폴 루이스, 그는 유명 콩쿠르 수상 경력이 있는 연주자는 아니다. 대신, 스승 브렌델(Alfred Brendel)의 수제자로, 오로지 음반과 공연만으로 관객을 만나며 자신의 음악 인생을 일구어 왔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섭렵하기보다, 한 작곡가를 깊이 파고들며 음악을 사유하는 연주자다.

그래서인지 그 역시 스승처럼 베토벤과 슈베르트에 천착했고, 오늘날 그의 이 두 작곡가 해석은 가장 정평 있는 해석의 음반으로 인정받는다.


황제 협주곡은 실제로 나폴레옹이 유럽전역을 정복해 가던 시기에 작곡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보통 웅장하고 힘찬 이미지로 연주되곤 한다.

그러나 오늘 그가 들려준 ‘황제’ 협주곡은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빛났다.

황제의 화려한 황금빛 투구는 없었고, 나폴레옹처럼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영웅도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황제는 로마의 철인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가까웠다.

명상과 사색, 그리고 내면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렸던 황제. 말년에 전장을 떠돌며 병영에서 생을 마친 군사령관이기도 했던 그 아우렐리우스처럼, 루이스의 연주 역시 스승 브렌델처럼 담백하고 정제된 음 속에서도 유려한 프레이징 사이사이로 거침없는 비르투오시티와 응축된 내면의 불꽃이 번뜩였다.

생각해 보면,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조차도 전장에서 써 내려간 글이었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연주 속에도 그런 기운이 스며 있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아우렐리우스에 대하여,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제시한 '철인왕(philosopher king)'이 실제 역사에서 구현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폴 루이스의 ‘황제’는 전통적인 장대한 해석과는 다른, 보다 사유적이고 내면적인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연주였다.

그는 사색과 긴장, 절제와 힘을 절묘한 균형으로 공존시키며, 외형적인 웅장함보다는 침묵의 통제를 통해 드러나는 위엄을 선택했다.

특히 왼손의 강한 힘은 절제된 균형의 근원이자, 구조와 긴장감을 아래에서부터 지탱하는 중심축의 원천이었든 것 같았다.


이렇듯 그의 황제는 이곡이 원래 갖고 있던 (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통적인 영웅 서사나 낭만적 승리의 드라마를 따르기보다는, 그 껍질을 벗겨낸 후 남는 구조적 긴장감과 이성적인 질서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낭만적 감정의 과잉은 경계되고, 이성적인 구조미가 강조되면서 감정은 절정 없이도 긴장을 유지하는 형태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면서도, 연주 전체에 긴장을 오롯이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이는 스승에게서 배운 그만의 고전적 균형감에서 비롯된 미덕이다.

울림은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투명한 물처럼 흐르도록 조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마 이런 면은 영국, 혹은 서유럽계 피아니스트 특유의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동구권이나 이탈리아 연주자들이 주로 격정적인 감정을 진폭 깊은 흐름으로 밀어붙인다면, 이들은 서구적 합리성이라는 것 때문인지 감정을 내세우기보다 안에 숨긴 채, 내면의 긴장감을 조용히 자아낸다.

그 결과 소리는 맑고 투명하며, 건조한 듯 하지만 또렷한 음색이다.

맑고 무게감 있는 음 하나하나는 오랜 세월 강물에 다듬어져 깨끗하게 빚어진 조약돌처럼 매끈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페달은 절제되어 있어 소리는 희미하게 퍼지지 않고 또렷하게 맺힌다.

이렇게 그의 피아노의 울림은 묵직하면서도 투명했고, 절제 속에서도 깊은 진동이 느껴졌다.


연주가 시작되니 이런 특징은 1악장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간 강한 왼손의 독립성과 명료한 베이스 감각을 통해 전체 구조를 단단하게 지탱한 결과, 그의 음악은 겉보기보다 훨씬 건축적으로 안정되고, 논리적인 긴장감을 품으면서 들려왔다.

서두의 아르페지오는 폭발적으로 터지지 않고, 견고하고 섬세하게 흘러나왔다.

그 안에는 내면의 통제력, 절도, 균형, 그리고 조용한 위엄이 있었다.

포르테는 외치지 않았지만 강했고, 피아노는 섬세했지만 무너지지 않으며, 모든 것이 질서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1악장의 중간중간 들리는 흐름은 특히 아름다웠다.

힘과 감정이 고르게 배분된, 밀도 있는 구조의 미학이 느껴졌다.


2악장 Adagio un poco mosso, 직역하면 “느리지만 약간 움직임을 더하여”.

루이스는 이 지시어를 자신의 해석 안에서 건조하지만 투명하게, 때론 수묵화 같은 질감으로 표현했다.

감미로운 서정 대신, 침묵과 여백이 주도하는 명상적인 세계가 펼쳐졌다.

약간은 메마르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음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지적인 숙고와 미세한 표정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감미로움이 아닌 명상적인, 또 다른 세계의 울림으로다가왔다


3악장에서는 리듬과 구조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두드러졌다

기술적인 힘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하모니의 전개가 얼마나 명료하고 균형 잡힌 지를 보여줬다.

청중은 음악을 감각인 선율로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구조를 이해하며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감정의 고조 대신, 질서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쾌감을 느끼게해 준 연주였다.


오늘의 황제는 전체적으로는 웅장함보다는 정제된 힘으로 연주된 황제였으며, 아우렐리우스 같은 품격 높은 철인왕, 철학자 황제였다.

한마디로 '내가 황제다'라고 외치는 피아노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조용한 황제의 피아노였다.


이어지는 2부

https://brunch.co.kr/@brunchbluesky/123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Major, Op. 73

Paul Lewis (Piano) / Jiri Belohlavek / BBC Symphony Orchestra

https://youtu.be/qLqesSmou9Q?si=aYz-PHX4zdnGIv0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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