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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절제의 바다 위에서, 빛으로 피어난 피아노

미켈란젤리와 첼리비다케가 만든 ‘황제’

by 헬리오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과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음반을 함께 들여다본다.

황제 협주곡 중 1부에 이은 2부, 음반 소개이다.


앞서 1부는 아래 링크에

https://brunch.co.kr/@brunchbluesky/122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 연재 (12)


* 형식과 절제의 바다 위에서, 빛으로 피어난 피아노 ;

- 미켈란젤리(Michelangeli)와 첼리비다케(Celibidache)가 만든 ‘황제’


미켈란젤리의 피아노는 파도 위에서 빛이 빚어낸 연금술이다.

검은 음표들 사이로 그의 손은 만 가지 색의 팔레트가 되어 떨어진다.
그의 음은 햇살처럼 투명하고, 물결처럼 흔들리다, 마침내 침묵 위에 색을 입힌다.

얼음처럼 맑지만 차갑지 않은 소리.

결빙된 고요 속에서 천천히 녹아드는 숨결처럼, 따뜻하고 오래 남는다.

음악이 멈춘 뒤에도, 그 소리는 숲의 향기처럼 몸속을 맴돌며 천천히 퍼져나간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길어 올려, 침묵 위에 금실처럼 풀어내는 연금술사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 바다로 돌아온다.
파도와 빛이 겹쳐지는 그 자리를, 다시 찾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연주가 끝난 밤,

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내가 가장 아끼는 ‘황제’를 다시 꺼낸다.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와 첼리비다케, 그리고 스위스 방송교향악단이 함께한 연주다.

(50년도 더 지난 연주이지만, 복각이 훌륭하게 이루어져 음질은 매우 우수하다. 미켈란젤리 특유의 깊고 투명하며 영롱한 음색을 감상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 수많은 ‘황제’ 음반 중에서 내 손이 가장 자주 가는 것은 언제나 이 음반이다.

이 연주는 첼리비다케의 절제된 위엄과 미켈란젤리의 초월적 기교가 응축된 하나의 구조물 같다.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투명함 속에서, 음표들은 마치 오랜 침묵 끝에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사람처럼 또렷하고 맑게 울린다. 단단하고 투명하게 다듬어진, 무결성의 결정체이다.


미켈란젤리와 첼리비다케의 ‘황제’는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고결한 형식 그 자체이다.

이에 비해, 오늘 들은 폴 루이스의 ‘황제’는 품격 있는 인간의 사유처럼 들린다.

루이스는 베토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해석자이며, '같이 걸을 수 있는 황제'처럼 들린다.

반면, 미켈란젤리의 황제는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거대한 조각상 같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조각을 보는듯하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가 보여주는 황제의 존재는 감히 해석할 수 없으며, '우리가 경배해야 할 황제'다.


루이스의 황제는 가까이서 말 걸어오는 이성적 고전주의자이고, 철학자가 연주한 황제라면,

미켈란젤리의 황제는 멀리서 침묵하는 숭고한 조형물이자, 신전에서 울리는 황제의 그림자다.

그는 청중을 음악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음악이라는 거대한 조형물 앞에 세워둔다.

이 연주는 두 명의 거장이 만나서 이루어낸 기념비적 건축물이고, 황제 협주곡의 가장 위엄 있고 냉정한 궁전이다.

누군가에는 이 고결함이 '인간미 부족'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이 순수의 미학이 '완벽에 가까운 예술'로 다가온다. 이 황제는 나에게는 철인(哲人)의 신전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연주를 들을 때마다, 큰 바다 멀리서 포말을 안고 천천히 밀려오는 파도를 떠올린다.

오케스트라는 깊고 느린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 위에 미켈란젤리의 피아노는 무수한 잔물결의 빛처럼 흩어진다.

멀리서 보면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처럼 잔잔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엔 수없이 많은 물결이 있다.

그의 피아노는 그 물결 위에 머무는 빛과도 같다.

결코 앞서 나가지도 않고, 결코 뒤처지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음 하나하나에 빛의 결을 더한다

마치 물 위에 잠깐 머무는 햇살처럼, 그의 피아노는 소리로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을 남긴다.

어떤 물결은 서로 부딪혀 깨지고, 어떤 물결은 스치듯 흘러가며, 각기 다른 궤도를 그리다가 모두가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질서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구조속에서 미켈란젤리의 피아노는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그 안에서 홀로 빛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장면에서, 파도와 빛이 서로를 닮았다는 생각을 놓지 못한다.

파도가 없으면 빛은 출렁이지 못하고, 빛이 없으면 파도의 표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연주는 바로 그 빛과 파도의 만남처럼, 고결하면서도 투명하다.

멀리서 보면 조용히 흘러가는 큰 물결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에 얽힌 수많은 색채의 작은 소리의 물결들이 있다

무수히 얽히고 흩어지며, 그러나 부서지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 그 미세한 결들이 모여 하나의 정교한 흐름을 만든다.


미켈란젤리와 첼리비다케, 그들의 연주는 격정적이진 않지만, 그 안에는 파도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밀어붙이는 긴장감, 그리고 바다가 침묵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 연주는 결국, 거대한 바다의 형식을 지닌 음악이다.

그 바다 위에서 빛나는 포말이 된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그리고 그 전체의 물결을 조율하는 첼리비다케의 손이 함께 만든, 하나의 해일 같은 '거대한 위엄’이 이 연주 속에 담겨 있다.


이 연주에서 첼리비다케는 그 전체의 흐름을 잡는 자다.

그가 짜놓은, 느리지만 단단한 리듬의 골격은 물결들이 제멋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잡아두는 음악적 중력이다.

반면 미켈란젤리는, 그 파도 위를 떠다니는 무수한 작은 물결의 빛이다.

그의 한 음 한 음은 빛나는 포말처럼 생겨났다 사라지며, 결코 흐름을 깨지 않고, 그 안에 생명과 빛을 더한다. 하나의 음이 떨어지면,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바다 위의 작은 별빛처럼 아름다움의 흔적이 된다.


그리고 이 연주의 또 다른 특징은 비교적 느린 템포다.

이 느림은 긴장을 흩트리기보다 오히려 안쪽으로 더욱 응축시켜, 격정을 안쪽에서 끓게 만든다. 빠른 연주에서의 격정이 폭죽처럼 터진다면, 이 연주의 격정은 두껍게 뭉쳐있는 구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밀도를 유지한 채 서서히 고조되어, 마침내 파열처럼 터져 나온다.

이 ‘황제’에도 분명히 격정이 있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첼리비다케와 만나서 그것을 불꽃처럼 태우지 않고, 금속처럼 단단히 담금질한다.

소리를 지르지 않지만, 침묵이 더 크게 울린다. 그것은 절제된 분노이며, 고결하게 정제된 열정이다.


1 악장은 단호한 질서 속 웅장한 조형미를 드러낸다. 도입의 아르페지오는 그 어떤 연주보다도 단단하고 질서 정연하다. 미켈란젤리는 폭발하지 않는다. 대신, 단단한 대리석을 정교하게 깎아 쌓아 올리듯, 건축적인 리듬을 통해 음악을 세워간다.

그의 타건은 강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고, 맑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첼리비다케의 오케스트라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전체 템포는 느릿하지만 시계태엽처럼 정밀하게 작동하여, 미켈란젤리의 구조적인 리듬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2 악장은 정적 속에서 피어나는 숭고함이다.

Adagio un poco mosso ( 느리지만 약간 움직임을 더하여)는 거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낸다.

미켈란젤리의 손끝은 물에 젖은 새벽 공기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울리며, 음 사이의 간격은 마치 침묵 자체가 음악이 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첼리비다케는 지휘봉 대신 시간 그 자체를 조율하는 듯한 느린 호흡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정적은 어떤 연주보다도 철학적이며, 거의 형이상학적인 숭고함 마저 품고 있다.

내게는 이것이 최고의 2악장이다. 나는 이곳에서 궁극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마지막 3 악장은 절제 속 화려함의 절정이다.

많은 다른 연주에서 이 악장은 격정적인 승리의 환호로 터지지만, 이 연주에서는 치밀하게 다듬어진 기교의 정밀함과 절제된 아름다움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무섭도록 정확한 리듬과 단 한 음의 흐트러짐도 없는 기교가 마치 기계적인 차가움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제되어 하나의 결정체로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단단하고 투명한 빛으로 울린다.

첼리비다케는 마지막까지 템포를 조이지 않으며, 추진력보다는 명상적 완결성을 지향한다. 음악을 바깥으로 쏟아내기보다 안으로 한음씩 한음씩 쌓아 올린다. 그 위에서 미켈란젤리의 오른손은 번개처럼 빠르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격정적 기쁨이 아닌 내면의 힘찬 승리이다.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Live in Helsinki 1969

Michelangeli / Celibidache /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


https://youtu.be/qy3rhh2vrR8?si=Qw8bz7ihkgGcdg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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