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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2부)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5)

by 헬리오스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5)

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1부)

https://brunch.co.kr/@brunchbluesky/153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5)


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2부)


음악은 언제나 언어보다 앞서 있다.


소리는 우리가 아직 문장을 배우기 전, 세상의 숨결을 처음 알아차릴 때 들었던 울림의 기억이다

그 울림은 말을 가지지 않았고, 의미로 환원되지 않았다.

그저 존재했고, 그 존재가 우리를 움직였다

우리가 세상의 의미를 배우기 전, 아직 단어를 모를 때부터 이미 우리는 소리를 통해 세계를 인식했다.

바람의 떨림, 어머니의 숨결, 빗소리의 리듬. 그것들은 어떤 문장보다 먼저 우리의 내면에 스며들었다.

그것들은 단어가 되기 전의 감각이었고, 그저 존재로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기에 음악은 언어 이전의 언어, 혹은 언어의 원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음악을 이해하려 할 때마다 언어를 부른다. 평론가들은 음 하나, 프레이즈 하나를 붙잡아 해석한다.

그것이 ‘기도’인지, ‘낭만’인지, 혹은 ‘고독’인지.

그러나 그 순간, 음악은 이미 사라져 있다.

언어가 닿을 때, 소리는 이미 흩어지고, 공기 속에는 잔향만 남는다.

평(비평)이란 결국 사라진 순간을 언어로 소환하려는 시도, 즉 사후(死後)의 언어이다.


음악, 그 소리 : 언어로 잡히지 않는 것들


음악은 논리로 구성되지만,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한 음정과 박자, 조성과 형식 위에 세워져 있으면서도, 그 틀 속에서 예기치 못한 감정과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바흐의 푸가는 수학적이지만, 동시에 신비롭다.

쇼팽의 선율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인간의 깊은 우수를 품는다.


언어는 정의(定義)를 통해 의미를 만든다.

무엇인가를 ‘이것이다’라고 규정해야 문장이 완성된다.

그러나 음악은 정의되는 순간 생명을 잃는다.

음악은 정지된 의미가 아니라, 흐름 속의 감각이다.

비록 연주자는 악보를 통하여 음악의 구조를 이해하고 연주를 하지만, 궁극적으로 연주자와 청중은 음악을 이해하기보다는 느낀다.


따라서 “이 곡은 신에게 바치는 기도 같다”는 말은 음악의 본질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그 음악이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의 문을 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그 음악이 그렇게 내 안에서 일으킨 감정의 파동을 언어로 기록할 뿐, 음악 그 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같은 곡을 듣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에겐 바흐가 신의 목소리로 들리고, 또 다른 이에게는 차가운 구조의 미학으로만 남는다.

또 누군가에겐 낭만주의 슈만처럼 들린다.
그 차이는 곡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다른 기억과 세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시대상이 없는 예술 ― 음악과 비평의 관계


음악에는 지시대상이 없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은 언어로 명명할 수 있고, 언어는 그 사물과 일대일로 대응하며 의미를 만들고 고정한다.
그러나 소리는 다르다. 소리는 사라지며, 시간 위에서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다만 감각과 감정의 방향을 가리킬 뿐이다.


그래서 음악을 언어로 옮기는 일은 항상 불가능에 가까운 번역이며 언제나 언어의 그림자놀이에 가깝다.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소리를 떠나 자기 안의 기억과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우리는 언어로 음악을 말할 때마다 사실은 자신 안의 기억과 이야기를 꺼내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음악에 대한 모든 평, 모든 비평은 음악 자체의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내면의 서사에 대한 진술이다.


임윤찬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둘러싼 엇갈린 평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것을 “슈만의 낭만주의적 피아노곡 같다”라고 느꼈고, 또 다른 이는 “신에게 무릎 꿇은 바흐의 기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평 모두 바흐의 음악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학적 서사를 음악과 결합시킨 것이다.


연주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제외하면,

모든 (인상)비평이란 소리에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는 행위, 즉 음악을 거울삼아 자신의 세계를 비추는 글쓰기다.

음악의 의미는 곡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곡이 내 안에서 어떤 상상과 기억을 일으키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풍부한 비평이란 음악에 대한 '지식'보다도 자신의 내면적 '서사의 깊이'에 비례한다.


비평이 풍부해지는 이유는 단순히 청음 경험이 많아서가 아니다. 음악의 구조를 잘 알아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음악의 객관적 구조보다 비평가 안에 축적된 이야기의 깊이, 그 사람이 내면에 쌓아온 문학적, 정서적, 인문적 세계의 폭이다.

내 안의 이야기와 문학적 감수성이 깊을수록, 내 안에 기억된 문장, 한 편의 시, 어떤 계절의 냄새, 오래된 슬픔이 많을수록 음악은 그 기억들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낳고 더 다채로운 의미로 열린다.

반대로, 내 안의 서사가 빈약하다면 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라도 단지 ‘좋았다’, ‘감동적이었다’ 정도의 평면적인 인상으로만 남는다.


음악이 말을 걸 때, 그 말은 세상의 사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음악은 스스로 외부의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비지시성 덕분에, 역설적으로 무한히 많은 내면의 세계가 열린다.

음악은 의미를 ‘전달’ 하지 않지만, 대신 우리 안의 기억과 상상을 깨워낸다.

그 ‘비지시성’이야말로 우리 안의 무한한 상상과 서사를 일깨우는 음악만의 자유이다.

음악은 결국,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무엇을 들은 것인가?” 그리고 더 깊은 물음, “그 음악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어떤 이야기를 들은 것인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언어로는 결코 가리킬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음악은 다시 한번 살아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음악과 비평의 간극이 드러난다.

음악은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 순간 비평은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도착한다.

이미 흩어진 소리를 붙잡으려 애쓰는 언어의 사후 기록이고, 실패를 자각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는 인간의 진심이 있다.

그것은 음악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언어의 아름다운 무력함"이기도 하다.

결국 좋은 (인상)비평이란, 음악을 분석하는 글이 아니라 음악을 매개로 자신을 드러내고, 음악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고백이어야 한다.


Bach : Goldberg Variations, BWV 988

Glenn Gould (Piano)


https://youtu.be/Klqjebjw8n4?si=mEjsTtx-4JnnuTpC



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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