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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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자는 불가능한 일을 맡은 사람이다.
그는 소리의 순간을 붙잡아 말로 바꾸려 하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음악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고, 언어는 시간 밖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이 울리는 동안 우리는 현재에 있지만, 문장을 쓰는 순간 이미 과거에 있다.
평자는 그 단절을 메우려 애쓴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언어로 되살려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마술사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이 마술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아무리 정교한 문장도 음의 떨림이나 숨결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 정교한 문장 속에서 조차도 음의 온도나 질감, 혹은 연주자의 호흡은 없다.
비평이 그리는 음악은 언제나 음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자는 써야 한다.
그가 쓰지 않는다면, 그 음악은 순간의 공기 속에서만 살다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은 음악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음악이 세상에 머물게 하는 방식 중 하나다.
그래서 비평은 시지프의 바윗돌처럼 영원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 실패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이것이 비평의 역설이자, 인간의 역설이다.
우리는 결코 소리를 완전히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끝내 말하려 한다.
그 말할 수 없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감각과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비평의 한계는 역설적으로 음악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음악은 번역되지 않아도 살아남는다.
그것은 논리를 통하지 않고도 인간의 감정에 직접 닿는다.
언어가 설명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움직이고, 눈이 젖는다.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음악의 가치는 이해가 아니라 경험에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비평의 역할은 설명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일에 있다.
좋은 비평이란 “이 곡이 이렇다”가 아니라, “나는 이 곡을 이렇게 들었다”라고 고백하는 글이어야 한다.
비평은 진실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에 닿으려 애쓴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다른 이의 마음에 또 다른 소리를 울릴 때, 비로소 음악은 언어를 넘어 다시 살아난다.
비평은 언어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그 한계 속에서조차 인간이 얼마나 끊임없이 느끼고, 해석하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언어의 한계는 비평이 쓸모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언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음악의 깊이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다.
음악비평은 언제나 실패하지만, 그 실패가 곧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결코 음악을 완벽히 말할 수 없지만, 그 말할 수 없음 속에서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바로, 비평의 진짜 이름이다.
나는 안다.
비평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음악은 흐르고, 언어는 머문다.
이토록 언어가 무력한데, 나는 왜 여전히 음악에 대해 쓰는가.
소리는 사라지고, 문장은 뒤늦게 따라온다.
음악은 살아 있는 현재이고, 글은 이미 지나간 과거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음악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의 연주, 한 번의 진동, 한 번의 숨결 — 그것들은 공연이 끝나는 순간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무언가 남는다.
그 잔향, 그 미세한 떨림을 붙잡아두고 싶은 욕망이, 나를 글로 이끈다.
나의 인상비평은 그 잔향을 기록하려는 시도다.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지만, 그때의 감각이 존재했다는 흔적만은 남길 수 있다.
평을 쓸 때 나는, 음악을 분석하지 않는다.
악보의 구조나 연주의 기술적 분석,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전공자나 연주자가 아니니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그 음악이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의 형상’을 남겼는지를 더듬는다.
내가 들은 것은 음표가 아니라, 그 음표들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킨 장면들이다.
그 장면을 글로 옮길 때, 음악은 다른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나의 비평은 내 안에서의 그 부활의 기록이다.
그래서 나의 평은 객관을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주관 속으로 파고든다.
나에게는 그 주관이야말로 음악이 실존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같은 곡을 들어도, 어떤 이에게는 눈 덮인 러시아의 숲이 떠오르고, 또 다른 이에게는 가을 저녁의 빛이 스며든다.
음악은 그 자체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의 내면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음악이란 결국 각자의 내면 속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재생시키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그 풍경을 언어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감상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쓴다.
그것이 완전하지 않아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음악이 내게 남긴 인간적 흔적을 그려내고 싶다.
나에게 비평은 분석이 아니라 기억이며, 판단이 아니라 고백이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기억과 내밀한 고백이기에 아름답다고 믿는다.
음악비평은 언어의 한계 안에서 태어나고, 그 한계를 품은 채 존재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바로 인간이 음악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끝내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사라지는 소리를 붙잡으려 애쓰며, 그 실패의 기록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발견한다.
음악이 끝났을 때,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그때의 마음, 그때의 숨결이다.
비평은 바로 그 "사라진 순간의 흔적"을 인간의 언어로 남기려는 행위이고, 결국 사라진 음악의 자리에서 인간이 남기는 작은 불씨다.
그 불씨가 모여 한 사람의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이 언젠가 또 다른 청중의 마음에 불씨처럼 옮겨 붙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리로, 감정으로, 혹은 또 다른 글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비평은 비록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함 속에서만 가능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시도 중 하나로 남는다.
결국 나에게 인상비평이란, 음악이 내 안을 스쳐 지나간 자리-그 따뜻한 흔적을 언어로 쓰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살아 있었다.”
https://youtu.be/eeSJ8Crve5Q?si=XKIdO105RnO1auY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