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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델 : 하프시코드 모음곡 1번 미뉴에트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3)

by 헬리오스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3)


핸델 : Harpsichord Suite 1번 HWV 434 중 No.4 미뉴에트 (피아노 편곡 연주)


추석날, 비가 내린다.

하늘은 먹구름에 잠겨 달빛 하나 비추지 못하고,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이 조용히 시간을 세고 있다.

아직 가을을 온전히 맞이하지도 못했는데,

이 비는 벌써 겨울을 재촉하는 듯하다.

바람 끝이 낯설게 차갑고, 마음 한켠에는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내려앉는다.

이런 밤, 나는 켐프의 핸델을 꺼내어 듣는다...


켐프가 연주하는 핸델의 Harpsichord Suite 1번 HWV 434 중 No.4 미뉴에트는 시간의 여백에 깃든 기도 같은 작품이다.


시간의 여백에 깃든 기도.


켐프가 연주하는 핸델의 미뉴에트는 마치 세월의 먼지를 머금은 빛이 낡은 성당의 벽돌 벽 위를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 같다.

그 빛은 시간의 표면 위를 걷는 듯, 조용히 세월의 결을 어루만진다.


손끝이 건반을 스칠 때마다 그 울림은 오래된 돌의 온기를 닮았다.

그의 피아노는 소리를 내기보다, 그저 빛처럼, 공기처럼 스며든다.

그의 손끝은 무게를 잃고, 건반 위에 머무는 순간마다 소리는 더 이상 ‘소리’가 아니라 ‘숨’으로 변한다.

그 숨은 오래된 성당의 공기처럼, 조용하지만 깊이 울리고, 소리는 벽을 따라 빛을 흘려보낸다.


한때 뜨겁게 구워졌던 벽돌이 세기를 건너며 식은 후에도 남긴 잔열처럼, 켐프의 음은 차분하지만 따뜻하다.

그는 단 한 음의 화려함도 남기지 않는다.

그의 연주는 소리를 내는 행위가 아니라 세월의 숨결을 건드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성당의 벽돌은 세월에 닳아 표면이 거칠고, 곳곳에는 빛이 스며든 자국이 있다.

그 빛은 건반 사이의 여백을 따라 번지고, 한 음과 다음 음 사이에는 세월의 먼지가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정적이 깃든다.


그 빛은 매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들어오고, 그 변화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며 벽은 그저 ‘존재’한다.
켐프의 피아노도 그렇다.
그는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시간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손끝의 여백을 얹는다.

그 여백의 느림은 템포의 느림이 아니라, 존재의 느림이고 시간의 여백을 되돌려주는 느림이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은 돌벽 틈새로 스며드는 빛의 정적과 같다.
그 정적은 음악의 부재가 아니라, 음악이 가장 깊이 살아 있는 순간이다.


켐프의 손끝에서 핸델의 미뉴에트는 더 이상 ‘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오래된 기도이자, 시간의 고요에 대한 찬가다.

화려함 대신 평온을, 감정 대신 세월의 숨을 택한 그의 연주는 한 사람의 생이 묵상으로 변해가는 여정을 닮았다.

성당의 벽돌 사이를 흐르는 빛처럼, 그의 소리는 한없이 미세하고 느리게,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 느림 속에서 우리는 삶의 무게가 조금씩 풀려나고, 시간이 자신을 내려놓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머무는 동안, 나는 그 여백 속에서 삶의 무게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곳에는 화려함도, 기교도, 불안한 감정의 흔적도 없다.

남는 것은 다만, 나의 내면에 남은 아주 오래된 평온의 그림자뿐이다.

마지막 음이 사라진 뒤에도 그의 여백은 오래도록 울린다.
그 울림은 더 이상 피아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스며든 세월,
돌과 빛, 그리고 침묵이 함께 만든 기도의 잔향이다.


Handel: Minuet in G Minor, HWV 434/4 (Arr. Kempff for Piano)

Wilhelm Kempff (Piano)


https://youtu.be/5VMMwcnSu0E?si=q1q1gTvTozkwB0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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