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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1)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1)

by 헬리오스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1)


가을의 문턱에서, 가을을 부르는 음악 :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소개 (1)



이맘때쯤 가을의 문턱에 서면,

나는 으레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올해는 아직도 가을이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자연은 제 할 일을 아는 듯,

여름꽃인 배롱나무는 이미 만개를 지나 꽃잎을 흩날리고,

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에는 어딘가 다른 계절의 기척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뭇잎 끝은 조금씩 붉게 물들고,

하늘은 어느새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져 높고 푸르게 펼쳐진다.

그 경계의 한가운데에서, 아주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첫 음이 조용히 내 안에서 깨어난다.


나에게 가을의 음악은 무엇일까?


내게 그 대답은 늘 같다. 바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 음악이 단순히 계절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는 순간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설렘, 쓸쓸함과 격정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는 순간, 혹은 저녁 공기가 서늘하게 내려앉는 순간, 이 곡은 늘 내 마음에 찾아온다.


시벨리우스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갑지만 뜨겁고, 고독하지만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이고 가을의 음악은 그런 음악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이 곡을 꺼내 듣는다.

1악장의 서늘한 고독은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3악장의 불꽃같은 맥박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다.

이 협주곡은 단순한 비르투오소의 무대가 아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대지와 인간의 심장, 두 세계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풍경이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 곡은 나에게 가을 그 자체다.

겉으로는 차가운데, 그 속에는 뜨거운 불꽃이 숨어 있다.

가라앉은 듯 고요하다가도, 어느 순간 뜨겁게 솟구친다.

차가움 속에 맥박이 있고, 쓸쓸함 속에 불꽃이 깃든 소리.

차가운 바람처럼 스치면서도, 가슴 깊은 곳을 불꽃으로 데우는 소리.

이 이중의 감각—서늘함과 열정—고독과 생명의 맥박이 동시에 뛰고 있는 그 모순된 순간.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곡을 가을에 찾게 되는 이유다.


1악장 – 서늘한 고독의 숲길


나는 이 협주곡을 들을 때면 깊은 가을 숲길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1악장은 언제나 차갑고 맑은 바람이 스쳐 오는 북쪽 숲의 입구에서 시작된다.


바이올린은 낮은 음역에서, 마치 얼음 밑을 흐르는 물처럼 보이지 않는 진동으로 말을 건다.

공기는 얇고 투명하다. 그 순간, 나는 깊은 숲 속을 홀로 걷는 기분이 된다.

발밑에는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바람은 차갑게 스쳐 지나간다.

나무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숲은 더욱 깊고 고요하다.


이 서늘한 풍경은 단순한 냉정이 아니라,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의 무게다.

나는 그 고독을 피해 가지 않고, 오히려 그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소리는 점점 또렷해지고, 얼음 같은 오케스트라의 바탕 위로독주의 선율이 실금처럼 번진다.

균열은 금세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금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내 마음의 어디와 맞닿아 있는지 천천히 더듬는다.

이렇게 이 첫 악장은 차갑게 얼어붙은 풍경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인간의 고독을 닮았다.


2악장 – 짧은 햇살의 위로


가을은 종종 흐리다.

그러나 흐린 하늘이 잠시 열리고,

금빛 햇살이 들판 위를 스칠 때가 있다.

가을 햇살에 벼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라.

그 황금빛이 얼마나 풍요롭고 따스한가.

가을 그 빛은 오래 머물지 않기에 더 따뜻하다.

2악장은 바로 그 순간 같다.

오케스트라가 잔잔히 배경을 이루면, 바이올린은 잃어버린 편지를 읽듯 서정적으로 노래한다.

쓸쓸함은 여전하지만, 그 속에 작은 위로가 깃든다.

계절이 허락한 짧은 온기처럼.


3악장 – 얼음을 깨는 뜨거운 심장


그러나 곡은 고독과 위로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악장에서 얼음은 갈라지고, 그 속에서 심장은 뜨겁게 솟아오른다.

빠른 리듬은 심장의 맥박처럼 뛰고, 바이올린은 불꽃처럼 솟아올라 얼음을 깨뜨린다.


이렇게 불현듯, 음악은 3악장의 문으로 건너가는 순간이 온다.

리듬이 박차를 가하자 대지는 얇게 얼어 있던 표면을 깨뜨리고, 그 틈새로 심장의 맥박이 솟아오른다.

이것은 춤이라기보다 생존의 속도다.

거침없이 도약하는 활, 숨을 몰아쉬는 활 긋기, 달려가다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첼로와 현악기의 탄력.

나는 그 박동 속에서, 차가움이야말로 뜨거움의 모태였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1악장의 고독과 3악장의 도약은 맞물려,

가을의 하루가 해 질 녘 황금빛 석양으로 타오르다 사라지듯,

얼음 아래 갇혀 있던 내 안의 불씨도 찬 공기와 마찰하며 마지막 빛을 내뿜고 꺼져간다.


나는 이 곡으로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첫 장을 열고 싶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계절의 경계에 선 내 마음을 마주한다.

가을의 문턱에서,

낙엽이 흩날리고, 바람이 서늘해지는 순간,

내 안의 모든 불안과 설렘, 고독과 열정이 얽혀 파도처럼 일렁인다.


그 격랑 속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나의 삶의 형체가 드러나고, 차가운 대지 위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심장의 불꽃을 확인한다.

계절이 바뀌듯 인간의 마음도 끊임없이 결을 바꾸며 변주한다.

한순간은 얼음처럼 서늘하다가도, 이내 불꽃처럼 치솟는다.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차가움은 침묵이 아니며, 고독은 끝이 아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심장의 맥박이 숨어 있고, 삶은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 곡은 단순히 가을의 음악이 아니라,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차가움과 열정이 교차하는 그 모호한 순간,

나는 그 거울 속에서 계절을 건너온 나의 얼굴과 불꽃같은 삶의 흔적을 다시 바라본다.


이렇게 오랜 세월의 고독과 불꽃을 지나온 지금,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온 그 음반은 무엇일까.

그 여정은 2부에서 다시 이어진다.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

Violin : Janine Jansen

Orchestra: Oslo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Klaus Mäkel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GAY79XU2h0FTCoHkz3_Qj-sIr7wACPBA&si=jDqh3or-AvcnnK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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