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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2)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2)

by 헬리오스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2)


가을의 문턱에서, 가을을 부르는 음악 :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소개 (2)



차가움과 뜨거움의 공존.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흔히 "북유럽의 겨울"을 그린 작품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 곡을 듣다 보면 얼어붙은 호수, 바람에 흔들리는 자작나무, 긴 밤과 차가운 별빛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음악이 단순히 풍경화에 머문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깊이 이 곡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 곡의 본질은 차가움 그 자체가 아니라, 차가움 속에서 끝내 꺼지지 않는 인간의 심장에 있다.

얼어붙은 대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 속에서 불꽃처럼 솟아오르는 열정.

바로 그 긴장과 균형이 이 협주곡을 특별하게 만든다.


연주자는 이 두 얼굴을 동시에 드러내어야 한다.

지나치게 낭만적이면 곡의 차가운 투명성이 무너지고, 너무 차갑게만 다가가면 인간적인 뜨거움이 사라진다. 이상적인 연주는 얼음 같은 음색 속에서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 곡이 단순한 비르투오소 협주곡을 넘어, 존재의 음악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브리 기틀리스(Ivry Gitlis)의 연주 – 균열 속의 체온


내가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는 연주는 이브리 기틀리스(Ivry Gitlis)의 연주이다.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며, 이스라엘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놀랍다. 동유럽의 전통을 딛지 않은 연주자가 이 곡을 이렇게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다니.

그의 연주는 결코 매끈하지 않다. 소리는 때로 삐걱거리고, 활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다 돌부리에 걸린 듯 불안정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증거다.

기틀리스의 시벨리우스는 얼음을 깨뜨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몸부림처럼 들린다


1악장 - 균열과 체온

1악장에서 이브리 기틀리스(Ivry Gitlis)의 연주는 고요한 설원 위의 균열처럼 시작한다.

그리고 고독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의 소리는 매끄럽지 않고, 얼음판에 난 금처럼, 바람에 갈라지는 나뭇가지처럼, 때로는 거칠고 삐걱이며 흔들린다.

차갑고 외로운 소리 속에서도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불완전한 떨림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뚜렷한 살아 있는 체온을 느낀다.

차갑게 정제된 완벽함이 아니라, 차가움에 저항하며 버티는 뜨거운 심장.

그가 그려내는 첫 악장은 이렇게 고독이면서 동시에 생존의 선언이다.

기틀리스의 1악장은 고독의 표면을 매끄럽게 얼려두지 않는다. 그는 숨은 상처를 가리지 않고 드러낸다.


2악장 - 짧은 햇살

2악장은 짧은 가을 햇살 같다.

흐린 하늘이 잠시 열리며 들판 위에 비추는 금빛,

오래 머물지 않기에 더욱 소중한 빛이다.


3악장 – 불안정 속의 진실

3악장은 얼음을 깨고 솟아오르는 심장이다.

활의 도약은 때로 위험하고, 음의 윤곽은 칼날처럼 매섭다.

하지만 그 위험이야말로 얼음 아래 갇혀 있던 심장이 실제로 뛰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의 연주는 조각이 아니라 몸이다.

박제된 풍경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마찰하고 상처 입고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기틀리스의 활은 거칠고 불규칙하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더욱 뜨겁다.

매끄러운 춤이 아니라, 얼음 위를 달리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몸짓이다.

그러나 그 불안정한 소리 속에서 나는 더 강렬한 진실을 듣는다.

얼어붙은 대지에서도 꺼지지 않는 심장의 고동이다.

그것이 그의 3악장이다.


어느 저녁, 바람이 유리처럼 차가워지던 날의 기억.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느 가을날 나는 강변의 느린 길을 따라 걸으며 1악장을 반복해 들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이 곡이 내 안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한 순간이.

숨이 깊어지고, 세상의 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독주의 가느다란 선율이 내 발걸음의 리듬과 겹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3악장이 시작되자 나는 조금 빨라졌다. 발끝이 먼저 리듬을 알아차리고, 심장이 따라 뛰었다.

그날 밤, 나는 이 곡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차가움은 나를 침묵으로 데려갔고, 뜨거움은 그 침묵에 맥박을 주었다. 가을은 그렇게 내 안에서 완성되었다.


어쩌면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그날의 기억 속에서, 이 계절의 길 위에서 비슷하게 답해본다.


소리는 가벼워야 한다.

낭만의 사설을 덧칠하기보다, 맑은 공기 속에 각 음이 투명한 윤곽으로 서야 한다.

그러면서도 감정은 마른 잔가지처럼 쉽게 부러지지 않도록, 절제된 열을 속에 품어야 한다.

기교는 표정을 꾸미는 화장이 아니라, 숨을 통과시키는 통로여야 한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잃지 않는 것,

1악장의 고독이 풀어지지 않게, 3악장의 불꽃이 번지기만 하지 않게.

그 드라마의 호흡을 붙드는 일이 중요하다. 얼음과 불이 서로를 삼켜 지우지 않고 공존하도록, 음색과 리듬, 비브라토와 루바토, 균형과 대비를 한 손에 쥔 채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한다


예술은 기교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기틀리스의 불완전한 뜨거움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연주로는 안네 소피 무터의 연주가 떠오른다.

무터의 시벨리우스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정제되어 있다.

흔들림 없는 균형, 매끄럽게 다듬어진 고독. 그녀의 연주는 고독의 아름다움을 차갑게 응시한다.

그래서 그 안에는 다른 온기가 스며들 틈이 없다.

소리의 표면은 눈부시게 매끄럽지만, 그 매끄러움은 삶의 숨결을 밀어내고 틈은 닫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예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위대한 예술에는 야생 동물이 있다. 길들여진 채로 말이다."

안네 소피 무터의 연주는 그 야생성이 없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완벽히 차갑게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1악장은 이 곡의 연주 중에서도 가장 차갑다. 완전히 다른 세계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정제된 고독의 미학.

하지만 내게는 기틀리스의 균열이 더 크게 다가온다. 완벽하지 않지만, 바로 그 불안정 속에서 숨결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3악장에서 무터는 얼음을 깨트리지 않는다.

그녀의 활은 차갑고 정제된 리듬 위에서 우아한 춤을 그릴뿐, 얼음 밑에서 불길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곡 위에서 만나는 여러 얼굴의 시벨리우스.


나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세 연주를 차례대로 꺼내 듣는다.

오이스트라흐와 로제스트벤스키, 시트코베츠키와 체코 필하모닉, 그리고 기틀리스.

모두 내가 오래도록 곁에 두었던 연주들이다.

오이스트라흐—로제스트벤스키에서 나는 품격 있는 추위를, 시트코베츠키—체코 필에서 정밀하게 윤곽 지어진 열을, 기틀리스에게서 거칠지만 진실한 불을 느낀다.

세 길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자리로 모인다.

차가움 속에서 뜨거움이, 뜨거움 속에서 차가움이 깃드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시벨리우스의 심장이고, 어쩌면 가을의 심장이다.


오이스트라흐와 로제스트벤스키가 함께한 연주를 들을 때면, 얼음을 억지로 깨부수지 않고도 심장의 불꽃을 느끼게 하는 품격이 있다. 그의 선율은 묵직하고 너그럽다.

오이스트라흐는 얼음 위에 다리를 놓듯, 차가움 속에 길을 낸다. 로제스트벤스키의 지지는 그 길이 무너지지 않도록 아래에서 든든하게 대지를 받친다.

두 사람의 세계에서 1악장의 고독은 품위 있게 정제되어 있고, 3악장은 질주보다는 관성에 가까운 힘으로 밀려오는 열기다.

서늘하면서도 뜨거운-이 역설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순간, 바로 그곳이 오이스트라흐의 세계다.


또한 시트코베츠키와 체코 필하모닉을 들을 때면 소리의 밀도가 다르게 다가온다.

체코 필 특유의 투명하고 단단한 음향 속에서 시트코베츠키의 선율은 얼음결을 따라가듯 정밀하게 그어진다.

1악장의 선은 가늘지만 꺾이지 않고, 3악장의 불꽃은 번쩍이면서도 흩어지지 않는다.

얼음 가장자리가 칼날처럼 매끈하기에, 그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더욱 선명한 형상을 갖는다.

서늘함이 뜨거움을 가두지 않고, 오히려 그 윤곽을 또렷하게드러내는 연주다.


모두 서늘하면서도 뜨겁다. 두 연주는 북유럽의 겨울 풍경을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빚어낸다.


그럼에도 가장 뜨거운 연주를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브리 기틀리스를 택한다.


이 곡은 타오르는 불과 같으며, 열정을 얼게 하는 얼음과 같이 연주되어야 한다.

차가움과 뜨거움은 결국 서로를 비추는 다른 두 얼굴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모순이 이 곡의 본질이다.


기틀리스의 연주는 이런 이 곡의 본질에 가장 가깝다.

그의 소리는 언제나 ‘완벽’과 거리를 둔다.

바이올린은 얼음을 뚫고 솟아오르는 불길처럼 거칠고 날카롭다.

균열이 있고, 흔들림이 있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진실이 있다.

기틀리스의 시벨리우스는 매끈한 조각상이 아니라, 눈밭 위를 달리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인간의 몸짓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의 불완전하면서도 뜨겁고 거친 숨결을 기억한다.


올해도 여느 해와 똑같이 가을의 문턱에 서서, 나는 이 세 연주를 차례로 꺼내 듣는다.

오이스트라흐의 서늘한 품격, 시트코베츠키의 절제된 열정, 그리고 길리스의 불타는 고독.

서로 다른 빛깔이지만, 결국 모두가 시벨리우스의 본질 — 차가움 속에서 피어나는 뜨거움, 고독 속에서 뛰는 심장 — 을 비추고 있다.



Jean Sibelius :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

Violin : Ivry Gitlis

Conductor: Jascha Horenstein

Orchestra: Wiener Symphoniker


Mov 1. https://youtu.be/8fjSlIZ5jDw?si=Nt0PeuWYGGZG6hfZ

Mov 2. https://youtu.be/l40J2MGH4Ms?si=3PZNzj37t-euuELp

Mov 3. https://youtu.be/si3ZnEeEZY4?si=5NQw2aAJLeNP06p8


Jean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 1966

Violin : David Oistrakh

Conductor : G. Rozhdestvensky

The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https://youtu.be/KZXPgoDe_84?si=2hzCagXJSJWBcXqp


Jean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 1953

Violin : Julian Sitkovetsky

Conductor : Nikolai Anossov

Czech Philharmonic Orchestra


https://youtu.be/zbR0Sp8gFXE?si=GI53LAQaeJwuzxqR



Jean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

Violin : Anne-Sophie Mutter

Conductor : Andre Previn

Staatskapelle Dresden


https://youtu.be/1rQauES7fFU?si=TKrGg5FATpeXlm1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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