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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1부)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4)

by 헬리오스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 - 연재 (4)


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1부)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철학이나 미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음악-특히 클래식 음악-을 들어온 한 사람으로서, 그저 내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적어두려 한다.


나는 음악을 듣는 일을 다른 무엇보다도 좋아한다.

어떤 날은 그저 한 곡의 선율이 나를 하루 종일 이끌고, 어떤 날은 오래된 녹음을 들으며 그 안에서 지나간 시간의 숨결을 듣는다.

그렇게 음악을 듣다 보면 자연스레 그 소리에 대해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진다.

들어온 만큼, 마음 어딘가에 쌓인 울림을 다시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그러나 음악-특히 지시대상이 없는 소리-를 말로 옮긴다는 것은 언제나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색함, 부자연스러움을 사랑한다.

때로는 언어가 닿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음악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면 다른 이들의 감상평도 자주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럴 때면, 늘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우리는, 말로는 붙잡을 수 없는 소리에 이토록 많은 말을 덧붙이려 하는가.

사실 이 의문은 꽤 오래전부터 내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요즘 들어 브런치에 음악에 관한 글을 자주 쓰다 보니, 이제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쯤은 정리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래전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생각들을 조용히 꺼내어 옮겨본다.


오래된 즐거움


우리가 듣는 많은 노래들―팝송이나 가요, 성악곡-그 안에는 언제나 언어가 있다.

노랫말이 곡의 내용을 전하고, 언어는 우리의 감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이 언어는 감정을 ‘이야기’로 묶고,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인한다.

하지만 기악곡은 다르다. 그 안에는 말이 없다.

그나마 표제음악 정도가 작곡가의 손끝에 남은 언어적 단서를 담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악곡은 그저 순수한 소리만으로 존재한다. 그 소리는 어떤 장면도, 사건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시간 위를 흐르며, 우리 마음속에만 무형의 형체를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언어 없는 소리를 듣고서 다시 언어로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그 안에 서사를 넣고, 이미지를 덧입히고, 감정을 부여한다.

마치 말을 잃은 세계를 다시 언어의 자리로 불러들이듯이.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혹은 예술의 본능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시도 속에 우리가 가진 표현의 본능이 숨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기악곡―특히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제나 말은 조금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어딘가 잡히지 않고, 손끝에서 흩어지며, 결국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남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인 게, 인간은 그런 뜬구름 잡는 유희를 수백 년 동안이나 즐겨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애쓰며, 그리고 그 애씀 속에서 오히려 감동을 발견해 왔다.
오늘날에도 그 본능은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
유튜브를 켜기만 해도, 하루에도 수만 개의 예술 비평이 쏟아진다. 모두가 저마다의 언어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붙잡으려 애쓴다. 나 역시 그 유희 속에 있다. 음악을 듣고, 그 감정을 더듬어 문장으로 옮기며, 사라지는 소리의 그림자를 붙잡으려 한다. 아마 그건,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실패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과정에서 느낀 한계와 어려움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사랑하는 음악의 이야기로 다시, 조용히 돌아가려 한다.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 소리 앞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듣는다.


지난 4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임윤찬의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회가 있었다.

임윤찬의 팬이 워낙 많고 연주 자체도 뛰어나 실황 연주 전체가 유뷰브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두고 평론가들은 전혀 다른 상반된 감상평을 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그 음악적, 기술적 완성도는 아주 뛰어나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해석은 상반됐다.

어떤 이는 그의 연주를 “슈만의 낭만주의 피아노곡을 듣는 것 같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이는 “바흐가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듯한, 신과 만나는 바흐 영혼의 가장 순수한 접점, 영혼의 기도” 같은 연주라고 평했다.


나는 그 두 말 사이에서 잠시 멈칫했다.
같은 연주, 같은 소리인데 어째서 이렇게 다른 세계가 열리는가.

아마도 그 답은 단순할 것이다.
음악은 언어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은 하나의 소리이지만, 그 소리를 듣는 인간의 내면은 서로 다른 기억, 감정, 세계로 채워져 있다.
결국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듣는 것이다


소리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놀라울 만큼 기술적으로 정교하다.
음의 질서, 템포의 구조, 페달의 섬세한 사용—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지만, 동시에 생명처럼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완벽함이 내게는 ‘차가운 구조물’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인간적인 온기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연주 속에서 ‘기도’도 ‘낭만’도 들었다.
어떤 순간엔 신 앞의 침묵 같았고, 또 어떤 순간엔 인간의 기억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서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해석 모두 완전히 옳다고도, 틀리다고도 할 수 없다.
음악은 언제나 해석보다 넓고, 언어보다 깊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를 붙잡지만, 음악은 의미를 흩뿌린다.
언어는 규정하지만, 음악은 열어젖힌다.

바흐의 변주곡은 계산된 구조로 쌓아 올려진 궁전이지만, 그 궁전의 창문마다 비치는 빛은 듣는 이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겐 신성의 빛으로,
누군가에겐 인간의 고독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단지 한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번지는 여름 오후의 그림자로.


Bach : Goldberg Variations, BWV 988 at Carnegie Hall’s Stern Auditorium in New York.

임윤찬 Yunchan Lim (Piano)

Dae : April 25, 2025


https://youtu.be/-8RV2S2PGHg?si=Lsv4vNNlWeZk34Hp


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2부)

https://brunch.co.kr/@brunchbluesky/154


소리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3부)

https://brunch.co.kr/@brunchbluesky/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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