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천막이 내려앉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 세헤라자데 모음곡

by 헬리오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 연재 (23)


2025년 9월 04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메이안 첸 지휘 / 서울 시립 교향악단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 그리고 오랜 시간 음악을 들으면서 켜켜이 쌓아온 추억들을 다시 꺼내어, 그 위에 나란히 놓아 본다.


밤의 천막이 내려앉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 세헤라자데 모음곡

Rimsky-Korsakov : Scheherazade, Symphonic Suite, Op. 35



아라비아 궁정의 밤의 천막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아라비아의 궁정은 검푸른 밤하늘 아래 숨을 죽이고, 나는 황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세헤라자데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저 여인은 오늘 저녁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콘서트홀의 붉은 좌석. 옆에 앉은 연인의 손끝이 팔걸이 위에서 나를 스쳤다. 지휘자의 손이 올라가고, 금관의 찬란한 울림에 바이올린의 소리가 가냘프게 하프를 타고 넘어온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관객이 아니었다. 검은 턱수염을 기른 술탄이 되어 옥좌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베일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세헤라자데가 되어 있었다.


바이올린이 가늘게 떨린다.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빛을 품은 선율, 살아 움직이는 음악이 되어 공기를 가득 채운다. 밤의 천막을 흔들며 내 귀에, 그리고 심장 깊은 곳에 동시에 스며든다.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다와 사막, 항해와 사랑, 축제와 폭풍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나는 그 이야기에 빠져들며, 오늘 밤도 칼을 내려놓는다.


나는 동시에 두 곳에 있다.

한쪽에서는 아라비아의 어둠 속, 그녀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새벽을 기다리는 술탄이 되어 숨을 죽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늘 저녁, 거대한 홀의 좌석에 앉아 눈앞의 오케스트라를 바라보고 있다. 지휘자의 손끝에서 파도처럼 번져나간 음들은 세헤라자데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겹쳐진다. 오케스트라의 금관은 황제의 위엄이자 바다의 격랑이었고, 목관은 바람의 속삭임이자 사랑의 귓속말이었다.


어느새 나는 객석을 벗어나 이야기 속의 항해자가 되어 있다.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밧드와 함께 바다를 건너고,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방랑하는 왕자들과 발걸음을 맞춘다. 그리고 정원의 달빛 아래, 사랑하는 연인들의 눈빛 속에 서 있다. 그들의 침묵조차 음악이 되어 흐를 때, 내 가슴 깊은 곳에 오래된 기억 같은 감정이 깃든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다. 홀의 천장은 아라비아의 천막이 되고, 악기들의 선율은 신비로운 등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난다. 옆자리의 연인은 여전히 무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지금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음표 하나하나가 그녀의 숨결이 되고, 선율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간이 된다.


그녀는 내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제는 커피숍에서의 작은 우연을, 그제는 비 오는 길에서의 침묵을, 오늘은 이 음악 속에서의 환상을 건넨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기다리며 하루를 산다.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세상의 모든 분노를 잊는다. 칼날을 내려놓고, 그저 듣는다. 그리고 내일을 약속한다.

세헤라자데는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간을 늘린다.

그녀의 말은 생존이지만, 동시에 유혹이다. 서두르지 않고, 멈추지 않고, 끝을 미루며 밤을 한 뼘씩 연장한다.


연주가 깊어질수록 나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를 다시 본다.

현실의 연인과, 이야기 속 세헤라자데가 겹쳐진다. 그녀가 고개를 조금 기울일 때마다, 궁정의 등불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녀의 숨이 바뀔 때마다 바이올린의 호흡도 함께 길어진다.

바이올린의 음은 말이 되고, 숨은 문장이 되며, 떨리는 현은 그녀의 심장이 된다.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오늘 밤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술탄이 되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동시에 한 사람의 연인이 되어 옆자리에 앉아 음악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마지막 선율이 흐를 때, 궁정은 서서히 사라지고, 천막은 다시 공연장의 천장으로 돌아온다

나는 다시 관객이 된다. 그러나 마음 어딘가에는 아직도 술탄의 왕좌가 남아 있고,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로 조용히 내 안에서 다음 밤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매일 밤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내일을 약속하는 것. 그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남는다. 음악이 멈추고 박수가 터져 나올 때, 나는 옆자리를 바라본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세헤라자데의 미소처럼, 천 하룻밤의 약속을 품은 얼굴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는 늘 이야기의 향기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바다와 사막, 궁정과 사랑, 축제와 폭풍이 네 개의 악장 안에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곡의 중심에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있다. 세헤라자데는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 그녀의 말과 침묵, 유혹과 절제가 곧 이 음악의 본질이다.


그런 면에서 이날 서울시향의 세헤라자데는 정제된 질서의 바다였다.


세헤라자데의 말과 침묵은 화려한 환상보다는 정제된 질서의 음악이었으며,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단단했고, 균형감이 뛰어났다.

과장되지 않은 음향 속에서도 섬세한 음들의 층위가 드러났고, 특히 현악의 질감은 유려하면서도 표면이 매끄러웠다. 확실히 현악은 이전보다 한결 성숙해지고 색채도 다채로워졌다.

관악과 타악 역시 절도 있는 힘으로 빛을 냈다. 연주는 감정보다는 구조의 명료함을 택했고, 색채의 향연을 품되 질서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첫 악장에서 세헤라자데는 관능적 유혹보다는 세련된 단정함에 가까웠다.

선율은 정교했으나, 감정의 가장자리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이야기의 서막은 신비롭게 열리기보다, 이미 조심스럽게 정돈된 세계로 펼쳐졌다. 서울시향은 이 바다를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무대가 아닌 질서의 공간으로 다루었다. 파도는 부서지지 않았고, 바람은 일렁이기보다는 선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정밀했지만, 그 정밀함이 세헤라자데의 관능을 깨우지 못했으며 거친 숨을 다소 눌렀다.


세 번째 악장은 이 연주의 장점이자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 악장이었다.

현악의 부드러운 음색은 완벽했고, 목관의 서정은 품격 있었다. 그러나 바이올린의 독주는 다소 평면적으로 들렸다. 섬세하고 정직한 연주였지만, 관능의 숨결이 부족했다. 조용히 울리는 세헤라자데의 목소리에는 그 관능의 선율 속에 깃든 생존의 떨림과 위험의 향기는 끝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대담했더라면, 이 사랑의 장면이 한층 살아났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날의 연주에서 그녀는 살아남았으나,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죽었다.

오늘 밤 세헤라자데의 생존은 뜨거운 생명력보다는 냉정한 균형의 산물이었다.

음악이 가진 또 하나의 진실인 혼돈의 아름다움이 균형의 아름다움에 묻혀버린 연주였다.

아쉬운 연주였다.


나는 오늘 저녁 이 음악을 들으며, 내 삶 속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황제에게 죽음을 유예시키는 세헤라자데의 목소리처럼, 나 또한 음악의 한 구절, 그 떨리는 선율에 붙잡혀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 오래된 추억 하나…


이 음악을 맨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런 곡이 있는 줄 조차 몰랐다. 피 끓는 사춘기 고등학교 시절 단골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음반을 발견했다. LP 음반 표지의 여인이 너무 매력적이라 주인아저씨한테 음악을 물어보고 냉큼 음반을 사 왔다. 순전히 재킷의 여인만 보고 산 앨범이다. 턴테이블에 LP를 올렸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그렇게 고혹적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나를 죽이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 소리는 마치 살갗을 스치는 속삭임처럼 감미로웠고, 영혼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떨림이었다. 나는 그 소리에 취했다. 얼마나 떨렸겠는가? 음반 재킷의 세헤라자데가 마치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듣고 또 듣고.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음반 재킷은 책상 머리맡 벽에 걸어두기까지 했다.

세헤라자데의 깊고 어두운 눈과 그 눈가를 장식한 영롱한 보석들. 그녀는 나의 은밀한 연인이었다. 대학교 갈 때까지 함께한 연인. 현실과 닿아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 살짝 위험하고, 살짝 달콤한 세계. 아라비안나이트 속 술탄의 밤은 나의 금지된 꿈이었고, 나는 그 꿈속에서 매일 밤 그녀와 함께 숨을 쉬었다. 이 음반은 고등학교 시절 나의 최애 클래식 음반이었다.



Rimsky-Korsakov : Scheherazade, Symphonic Suite, Op. 35

Eugene Ormandy : Conductor

Anshel Brusilow : Solo Violin

The Philadelphia Orchestra


https://youtu.be/1fLDSyO21yM?si=gIr3Q6_cC7Iaq5lV


* 추천 연주 하나 더...


키릴 콘드라신 지휘,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1979, Philips)

콘드라신은 러시아 지휘자로서 이 작품의 토착적 색채를 깊이 드러내면서도, 콘세르트헤바우의 세련된 음색을 통해 관능적이면서도 우아한 해석을 들려준다. 바이올린 독주의 헤르만 크레바스는 세헤라자데의 목소리를 가장 매혹적으로 표현하며 들려준다. 바이올린이 이렇게 관능적이고 매혹적일 수가 없다. 오케스트라의 황금빛 음색과 극적인 다이내믹의 대비가 뛰어나며, 특히 바다의 장면에서 폭풍과 고요함의 대조가 압도적인 연주다.


Rimsky-Korsakov : Scheherazade, Symphonic Suite, Op. 35

Kirill Kondrashin : Conductor

Herman Krebbers : Solo Violin

Koninklijk Concertgebouworkest


https://www.youtube.com/watch?v=prGIaIGs9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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