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봄...봄을 기다리는 마음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 단조 Op.11

by 헬리오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 연재 (22)


2026년 2월 3일, 서울 예술의 전당.

제19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 위너스 갈라 콘서트 중에서.


아직 오지 않은 봄...봄을 기다리는 마음 :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 단조 Op.11


1. 봄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릴 때가 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2월, 바람이 여전히 차가운 이른 아침. 창밖의 햇살은 따스하지만 땅은 여전히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눈은 그쳤는데 공기는 아직 풀리지 않고, 햇빛은 길어졌지만 땅은 말을 아낀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봄의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듣는다.

이 곡을 들으면 봄이 온다. 아니,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깨어난다. 봄이 도착한 뒤의 음악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스스로를 데우기 위해 조심스레 봄을 불러내는 음악이다.

그런데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늘 무언가가 떠나기 직전인 듯한 느낌도 든다.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아직 이별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마음 한켠에서는 알고 있다. 돌아오지 못할 계절을 예감하고 있다. 그 예감이 이 곡을 밝게도, 슬프게도 만든다. 희망과 상실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채, 한 음표 안에서 함께 떨린다.


이 곡은 스무 살의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 1830년에 쓴 음악이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갓 졸업한, 청춘이 허락한 가장 눈부신 순간에 서 있던 젊은 천재. 그는 빛나고 있었지만 동시에 떠나야 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유럽으로. 그러나 그가 딛고 선 폴란드는 이미 지도에서 지워진 나라였다.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떠난 지 한 달 뒤 조국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을, 그 봉기가 실패할 것을, 자신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이별의 음악이라 불리지만, 이상하게도 이 안에는 또다른 생명력이 흐른다. 청춘의 젊음만이 가진 풋풋함과 애틋함이 공존한다. 밝으면서도 불안하고, 설레면서도 슬프다. 희망과 두려움이 한 음표 안에 함께 숨 쉰다.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를 향한 간절함이, 출발 앞의 설렘이,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예감이 흐른다. 마치 얼어붙은 땅 아래에서 씨앗이 부풀어 오르듯. 아직 눈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생명처럼.


이 음악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끝과 시작 사이 어딘가에서, 겨울과 봄 사이 어딘가에서, 이별과 출발 사이 어딘가에서.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 나는 늘 문턱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아직 건너지 않은 문턱. 그러나 이미 한 발을 내디딘 문턱.

그것이 이 곡을 듣는 내게 봄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봄도 그렇지 않은가. 봄은 기쁨만이 아니다. 봄은 또한 불안이고, 떨림이고,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명의 충동이다. 겨울의 끝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예감이다. 정말 봄이 올까? 이 추위가 끝날까?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안다. 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땅속 깊은 곳에서 이미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확신보다는 망설임에 가깝고, 환희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운 소리이다.

눈 아래에서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아직 보이지 않는 봄이 이미 안쪽에서는 숨 쉬고 있다는 증거처럼, 이 음악은 그렇게 울린다.


나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2월에 이곡을 찾는다, 이 음악을 들으며 나는 기다린다. 봄을, 생명을, 아직 오지 않았지만 반드시 올 그 순간을.


며칠 전,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곡을 들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 갈라 콘서트. 첫 곡이 바로 이 협주곡 1번이었다.


2. 예술의 전당, 2025년 2월 3일


객석의 불이 서서히 꺼져갔다. 지휘자가 단상에 올랐고, 피아니스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건반 앞에 앉았다. 나는 프로그램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또다시 생각했다. 이 곡이 내게 언제나 봄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어쩌면 떠남과 봄은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둘 다 무언가를 뒤에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니까. 둘 다 두렵지만 동시에 설레는 일이니까. 겨울의 끝에서 힘차게 첫 음이 울린다.


1악장 : 겨울의 끝, 힘의 예감


오케스트라가 첫 화음을 울렸을 때, 차가운 공기가 홀 안을 가로질렀다.


1악장은 아직 겨울이다. 땅은 얼어붙어 있고, 하늘은 잿빛이며, 바람은 여전히 날카롭다. 그러나 이 겨울은 한겨울의 그것과는 다르다. 2월의 겨울, 끝을 알고 있는 겨울이다. 그 속에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운이 있다.

오케스트라의 서주는 장엄하지만 불안하다. 마치 땅 밑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려 애쓰는 것 같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힘의 움직임 같은. 그리고 피아노가 들어왔다.


연주자의 손가락이 건반을 스쳤을 때, 나는 그것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첫 터치는 조심스러웠다. 도전이라기보다 탐색에 가까운 손길. 쇼팽의 피아노는 결코 오케스트라와 겨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을 유영하듯 흐르고,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망설인다.

이 선율에는 아직 확신이 없다. 봄이 올까? 정말 올까? 이 추위가 끝날까? 떠나야 할까? 정말 떠나야 할까? 그러나 동시에 그 망설임 속에서도 열망은 분명하다. 빠르게 내달리는 음계들, 격정적으로 쏟아지는 아르페지오들. 그것은 추위를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다. 아직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몸을 던지려는 젊음의 충동이다.


연주자의 손끝에서 쏟아지는 음들은 때로 서리처럼 날카로웠고, 때로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이 악장은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몸부림의 끝에서, 음악은 이미 다음 계절을 예감하고 있다.

악장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객석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2악장 : 땅속의 봄, 고요한 각성


로망스가 시작되자, 시간의 결이 바뀌었다..

아직 눈 덮인 들판. 그러나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되고 있다.

씨앗들이 부풀어 오르고, 뿌리는 방향을 찾고, 땅속의 물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누구도 볼 수 없는 봄이다...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가장 진실한 봄이다...

. . . 오직 땅만이 알고, 씨앗만이 느끼는 봄.


2악장, 피아노의 선율은 노래하지 않는다.

숨을 쉰다. 속삭인다. 연주자는 건반을 누르기보다 어루만지듯 음을 풀어놓았다. 각 음은 공중에 떠올라 천천히 퍼져나갔고, 홀 안은 완벽한 고요 속에서 그 떨림을 받아 서로의 온도를 확인한다.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여린 선율이 또 있을까. 쇼팽의 녹턴을 연상시키는 이 멜로디는 마치 자장가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하고, 연서 같기도 하다. 이날의 연주자는 이 선율을 거의 숨결처럼 연주했다.


이것은 땅속의 봄이다.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봄. 그래서 이 악장은 은밀하고, 내밀하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대화한다기보다는 함께 호흡한다. 현악기들의 부드러운 반주 위로 피아노는 꿈을 꾸듯 노래하고, 때때로 관악기가 조심스럽게 화음을 더한다. 이 음악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떠나는 자의 마음, 남겨두고 가는 사랑, 아직 말하지 못한 고백들이 이 선율 안에 숨어 있다.


중간부에서 잠시 선율이 조금 더 격정적으로 변하고 감정이 고개를 들지만, 곧 다시 가라앉는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씨앗이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의 고통과 환희. 뿌리가 얼어붙은 흙을 뚫고 뻗어나가는 순간의 힘겨움과 희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직은 드러날 수 없다. 아직은 땅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선율은 다시 고요해진다.

연주자의 손이 마지막 화음을 눌렀을 때, 그 여운은 한참 동안 공기 중에 머물렀다. 2악장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름답고, 여리고, 애잔하고, 슬프면서도 희망에 찬 채로.


3악장 : 생명의 분출, 봄의 선언


그리고 비바체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폭발이었다. 해방이었다. 환희였다.

산속 깊은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 얼음 아래 갇혀 있던 샘이 깨어나는 순간. 첫 물방울이 얼음 틈을 비집고 나온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갑자기 물줄기가 된다. 옹달샘, 땅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생명의 물. 그것은 차갑지만 동시에 뜨겁다. 겨울을 품은 채 봄을 선언한다.


3악장의 피아노는 그 샘물이다. 연주자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날았다. 쇼팽 특유의 폴로네즈 리듬이 살아 있는 이 악장은 춤이자 노래이고, 기쁨이자 생명력 그 자체다.

폴란드의 춤. 조국의 춤. 쇼팽은 평생 이 리듬으로 폴란드를 기억했다.

음들이 쏟아진다. 폭포처럼,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처럼. 이 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서로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준다. 오케스트라가 리듬을 만들면 피아노가 그 위를 수놓는다. 피아노가 선율을 노래하면 오케스트라가 그 아래를 받쳐준다. 이것은 단순한 협주가 아니라 협력이다.


봄이 오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땅과 하늘, 물과 바람, 씨앗과 흙,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일 때 계절은 바뀐다.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서정적인 에피소드들. 갑자기 템포가 느려지고, 피아노가 꿈꾸듯 노래하는 순간들. 그것은 마치 샘가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것 같았다. 물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돋아난 풀잎을 발견하며, 아직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흙냄새를 맡으며. 혹은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며. 비스와(Wisla) 강변의 풍경. 바르샤바 거리의 풍경.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풍경.

그러나 그 쉼표도 잠시, 다시 비바체의 주제가 돌아오고, 다시 춤이 시작되고, 다시 기쁨이 넘쳐흐른다.


마지막으로 향해 갈수록 음악은 점점 더 밝아지고, 더 빠르고, 더 환희에 찬다. 코다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내달릴 때, 나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새들이 돌아오는 소리, 씨앗이 싹트는 소리. 모든 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합창이 되었다.

폭발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객석이 일어섰다. 피아니스트는 땀에 젖은 얼굴로 일어나 인사했다.


3. 떠난 자, 돌아오지 못한 자


쇼팽이 이 곡을 쓸 때 정말 봄을 생각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떠나야 하는 조국을 생각했을 테고,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를 음표에 담았을 것이다.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조국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을. 그 봉기가 실패할 것을. 자신이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이날 무대에 선 연주자는 젊었다. 2005년생 케빈 첸. 쇼팽 콩쿠르 2위에 입상한 그는, 스무 살의 쇼팽이 쓴 음악을 자신의 젊음으로 연주했다.

1악장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불안, 2악장의 꿈같은 아름다움, 3악장의 터져 나오는 생명력. 그것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싱그러움이었다.

어쩌면 나이 든 거장이 연주했다면 이 곡은 더 깊고, 더 성숙하고, 더 비극적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떠난 자의 슬픔을, 돌아오지 못한 자의 그리움을 더 묵직하게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젊은 연주자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달랐다. 그것은 아직 떠나기 전의 음악이었다. 이별의 슬픔보다는 출발의 설렘이, 상실의 아픔보다는 가능성의 희망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더 풋풋했다. 더 싱그러웠다. 1악장의 격정은 겨울 끝 얼음 밑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힘이었고, 2악장의 서정은 아직 순수한 꿈 그 자체였으며, 3악장의 환희는 막 터져 나온 샘물의 투명함 그대로였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쇼팽이 이 곡을 쓸 때 가졌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1830년,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 봉기도, 실패도, 망명도 없었던 그때.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가려 했던 스무 살 청년의 마음.


쇼팽은 평생 피아노로 폴란드를 기억했다. 마주르카로, 폴로네즈로.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 긴 여정의 시작점이었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막 떠난 젊은 음악가는 스승으로부터 "비범한 재능, 음악적 천재"라는 말을 건네받은 채 이 곡을 안고 처음으로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가 건넨 것은 첫 인사였지만, 그 인사 속에는 이미 마지막 작별이 예고되어 있었다. 다만 그 이별이 얼마나 길고 아픈 것이 될지, 그때는 아직 몰랐을 뿐이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음악은 작곡가의 예상을 넘어선다. 듣는 이의 시간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작곡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연주자가 어떻게 해석하든, 결국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연주자의 나이와 경험이, 그들의 젊음과 열정이, 음악에 새로운 색깔을 입히는 것이다.


이날 저녁, 2월의 초입, 나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봄을 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올, 그래서 더욱 간절한 봄을. 아직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절의 봄. 젊은 연주자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스무 살 쇼팽의 싱그러운 봄을 들었다.


연주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바람은 매섭고 차가웠다. 그러나 그 바람 속 어딘가에는, 분명 봄의 기척이 섞여 있었다.

옹달샘의 첫 물방울처럼. 바르샤바를 떠난 청년의 첫걸음처럼. 그리고 무대 위에서 건반을 두드렸던 젊은 연주자의 땀에 젖은 미소처럼.



4. 덧붙이는 말 : 이별


1829년, 열아홉 살의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했다.

스승 요제프 엘스너는 졸업 증명서에 이렇게 적었다. "비범한 재능, 음악적 천재."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졸업 직후, 쇼팽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1829년,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그리고 1830년,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작품번호는 거꾸로 매겨졌지만, 실제로는 2번이 먼저, 1번이 나중에 쓰였다. 불과 1년 사이에 쓰여진 이 두 곡은 거의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진 청춘의 기록이다.

청춘의 정점. 폭발하는 재능과 함께 밀려든 불안,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자라나던 시기였다.


먼저 작곡한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Op. 21의 2악장 라르게토는 쇼팽이 한 여가수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에게 품었던 말 못 한 사랑의 감정이 담긴 악장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은 1830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협주곡 2번의 2악장(라르게토)에 대해 "나의 이상향을 떠올리며"라고 썼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이 곡은 선언이라기 보다는 세상으로 나가는 인사였다. 세상으로 나서는 스무 살 청년의, 아직 말을 고르지 못한 인사. 설렘과 떨림,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한데 섞인 인사였다. 미래를 향한 희망과 두려움. 그 모든 것은 음표가 되었다. 그래서 이 음악은 밝으면서도 불안하고, 설레면서도 슬프다. 그것이 1829년에서 1830년 사이, 불과 1~2년 사이에 몰려 있던 쇼팽의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바르샤바 음악원 졸업, 청춘의 정점, 그리고 조국을 떠나게 되는 운명.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던 시기였다.


두곡을 비교해 보면 2번은 19세의 쇼팽의 더 내밀하고, 수줍고, 밤의 감정을 보여주고 1번은 20세의 쇼팽의 조금 더 바깥으로 향하고, 밝고, 봄빛이 감도는 음악을 보여준다.

같은 청춘인데 19살과 20살의 차이가 이렇게 분명하게 들린다는 게 쇼팽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점이기도 하다.


쇼팽에게 졸업은 끝이 아니라 떠남의 시작이었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빈으로 떠났다. 1830년 11월 2일, 쇼팽은 마차에 몸을 실어 바르샤바를 떠났다.

이 시기, 그가 딛고 선 땅, 폴란드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세 번째 분할을 당한 지 34년. 폴란드는 이미 지도에서 지워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국경은 사라졌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고, 춤은 남아 있었으며,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폴란드어로 사랑했고, 폴란드의 리듬으로 걸었다. 쇼팽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떠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는 봉기로 흔들렸다. 11월 29일, 폴란드 사관생도들이 러시아 총독 관저를 습격했다. 바르샤바 봉기. 마지막 독립의 몸부림. 쇼팽은 빈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조국이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절망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봉기는 실패했다. 1831년, 러시아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수많은 죽음과 추방. 쇼팽은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결국 파리로 향했고,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그의 음악 안에서, 폴란드는 계속 숨 쉬고 있었다. 피아노로 마주르카를 쓰고, 폴로네즈를 썼다. 폴란드의 춤이 그의 음악이 되었다. 그렇게 파리에서도 그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죽을 때까지.



5. 추천 음반 연주 :


Chopin : Piano Concerto No. 1 in E Minor, Op. 11

Piano: Arthur Rubinstein

Orchestra: New Symphony Orchestra of London

Conductor: Stanislaw Skrowaczewski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곡의 연주는 루빈스타인의 것이다.

노년에 남긴 녹음이지만, 그 피아노에는 늙음의 그림자가 거의 드리워져 있지 않다.

오히려 스무 살 언저리의 망설임과 설렘이 시간을 거슬러 고요히 되살아난다.


봄을 앞둔 마음의 두근거림,

한 걸음 내딛기 직전의 머뭇거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등을 돌리지 못하는 이별의 여운까지,

이 모든 감정이 이 연주 안에서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숨 쉰다


어쩌면 노년이었기에 가능했던 연주인지도 모른다. 젊음을 기억하는 자만이 젊음을 그토록 애틋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떠나온 시간이 길었기에, 그는 이별의 무게를 더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반주도 완벽하다. 피아노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호흡한다. 이 연주를 듣고 있으면, 1830년 11월, 쇼팽이 마차에 몸을 실던 그날의 공기가 느껴진다.

이 연주는 이 곡이 품고 있는 봄의 설렘과 이별의 온도를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들려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_F5FmHcgre0&list=RD_F5FmHcgre0&start_radio=1&t=1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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