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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과 서원의 하나의 꿈

산행기 (3) : 병산에 올라 병산서원을 굽어본다.

by 헬리오스

산행기 (3) : 2024년 가을

병산과 서원의 하나의 꿈

병산에 올라 병산서원을 굽어본다.



만대루 일곱 폭 병풍이 펼쳐지면

병산이 한 폭씩 스며든다.

나무들은 굽이굽이 지붕 위 푸른 능선 따라 흐르고

마루 사이로는 낙동강의 잔잔한 흐름만이 지나간다.

입교당에 내리는 햇살마저 고요를 빚어내고,

서원의 숨결 속에서 시간은 잠든 듯 흐르고 있다.


나에게 병산서원은 오랫동안 내 기억 어딘가,

시간의 먼지 속에 묻혀있었다.

만대루와 입교당, 병산과 낙동강의 기억은

오래된 집의 흙벽에서 떨어져 나와 부서진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채 말이다.

그때는 서원만 둘러보고 돌아섰고, 미처 병산에 올라 저 멀리 서원을 내려볼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서원 앞의 절벽처럼 선 병산,

그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땅과 물을 잇는 평온한 다리처럼 누워있는 백사장

그리고 서원을 감싸듯 휘감아 늘어진 소나무들.

이렇게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지우며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있는

병산서원의 온전한 풍경을 보지 못하고 나는 돌아섰다.

누군가가 말했다. 병산서원은 병산의 병풍바위에 올라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온전히 완성된다고.

이번에 그래서 다시 다녀왔다.


서원 안은 지금도 여전히 지혜와 사색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곳에서 느껴지는 숨결은 고요하지만

세상과 멀리 떨어져 진리를 탐구하는 영혼의 속삭임처럼 강렬하다.

서원에서 마주하는 병산은

낙동강의 푸른 물을 건너 압도하는 기세 없이

그저 시원하고 멋스럽게 서있는 모습이 찬탄스럽다.


이제는 병산에 올라 서원을 본다. 병산 위에서 서원을 굽어보는 감정은 다르다.


서원은 인적 드문 화산 자락의 끝에 홀로 서있다.

병풍바위에 서서 강너머 서원을 바라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서애 선생은 왜 저기에 병산을 바라보면서 서원자리를 잡았을까?

왜란 후 당쟁에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하회에 은거한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병산서원은 서애가 세상을 뜬 후 창건되었지만, 이 터는 원래 서애 자신이 생전에 정한 자리다.

퇴계의 학봉학파와의 자존심 싸움을 미리 알았을까?

서애는 학자보다는 정치가로서 후학의 신망을 얻었다.

그래서일까? 권력의 덧없음을 먼저 알았을까?

여강서원에서의 9년에 걸친 동거를 청산하고 서애의 위패는 다시 병산서원으로 돌아온다.


작고 아늑한 서원의 자리는 숲 속에서 서늘히 살아나고

물길 앞의 서원은 백사장 너머로 병산을 우러르며 쉬어간다.

병산의 그림자는 서원의 뜨락에 깊이 드리우고

서원은 병산에 닿지 않고도 병산을 품고 스스로 고요하게 서있다.

저 멀리서 물길을 넘고 바람을 넘어온 고독의 자리는

지혜의 무게와 고요한 허공이 깃들어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듯,

멀어져 가는 아득한 꿈처럼 쓸쓸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곳에서 병산과 서원은 하나의 꿈이 된다.

다 비워버린 노학자의 무상의 평온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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