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뽑는 사람'의 비명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른다.
* 가을을 끝자락, 겨울의 문턱에서 다녀온 카라바조 전시회 (2024년 11월)
그림은 찰나에 새겨진 진실을 비추고,
소설은 시간을 관통한 서사의 진실을 들려준다.
카라바조의 손은 치아를 뽑아내며 흔들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손가락은 편지를 쓰며 떨린다.
카라바조는 '이 뽑는 사람'에서 시간을 가르고 공간의 숨을 붙잡아 고통을 정지된 비명으로 빚어낸다.
그에게서 빛은 고통의 순간을 드러내는 칼날이다.
시간의 흐름을 단칼에 끊어내 육체적 고통의 순간을 캔버스 위에 얼어붙게 하고 비명 소리를 화면밖의 공간까지 울리게 한다.
그림 속에서 근육은 긴장되고 손끝은 무기력하며,
빛이 침투한 얼굴의 주름마다 비치는 절망은 어둠의 침묵 속에서도 소리를 낸다.
그의 빛은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절망 속으로 파고들어 가려졌던 비참함을 드러내고,
어둠은 고통의 배경이 되어 그 상처의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이 뽑는 사람', 어둠 속에 번지는 비명은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부른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엮어낸 서사다.
소설 속 두 사람의 편지 속 공간을 누비는 발걸음, 시간을 따라 흐르는 한숨과 떨리는 손끝.
시공간이 응축된 편지라는 서사 속에서, 단어마다 스며드는 고통과 고독의 숨결은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강물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인간의 삶을 잠식해 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의 편지 한 장에 담긴 작은 행복의 조각은, 마치 그림 속 한 줄기의 빛처럼, 인간이 끝내 고통 속에서도 삶을 붙드는 이유를 드러낸다.
카라바조의 빛이 비명을 찢으며 어둠 속에서 태어나듯, 도스토옙스키의 짧은 행복감은 삶의 척박한 배경 속에서 오리혀 더 강렬한 생명의 숨결로 다가온다.
표면적으로 두 작품은 다른 매체와 다른 시대에 속하지만,
그 근원에서 모두 인간의 고통과 삶의 본질을 드러낸 점에서 맞닿아 있다.
카라바조가 순간의 비명과 찰나의 섬광 속에서 고통을 빚어낸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시간을 따라 흐르는 비극의 강물에서 고통의 탄식을 길어 올린다.
카라바조의 빛은 치아를 뽑는 장면을 냉혹하게 비추고, 도스토옙스키의 빛은 편지 속 행간에 희미하게 깜박이며 둘의 영혼을 은은히 밝혀준다.
둘의 빛은 서늘하다.
그것은 구원의 약속이 아니라, 삶의 상처를 가차 없이 들춰내는 칼날 같은 빛이다.
두 작품 모두에서 빛은 인간의 생명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되며, 삶은 이처럼 어둠 속에서 서늘한 빛을 내며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끝내 꺼지지 않고 살아간다.
캔버스의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는 카라바조처럼 도스토옙스키는 고통과 절망의 서사 속에서 인간의 깊은 생명력을 포착한다.
찰나와 서사는 이렇게 얽혀든다.
빛이 어둠을 찢고,
행복이 고통을 관통하는 순간,
우리는 그림과 소설의 서로 다른 매체 속에서도 같은 진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과 희망이 동시에 빛나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이다.
친구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고통은 매일 현관 앞에 배달되어 오는 택배 상자와도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끔씩 그 상자 속에는 삶의 희망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배달되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