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이 이끄는 KBS교향악단의 연주와 곁에 둔 음반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과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음반을 함께 들여다본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말러다.
2월 21일, KBS교향악단이 정명훈의 지휘로 들려준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예술의 전당에서 마주한 그 순간, 말러의 음악은 거대한 강이 되어 흘렀다.
정명훈의 부활은 마치 구도자의 길과 같았다.
그의 음악에는 요란한 몸짓도, 감정을 격렬히 분출하는 과장된 표현도 없었다. 대신, 오랜 사색 끝에 도달한 깊은 신념과 묵묵한 흐름이 있었다.
1월, 서울시향과 함께한 츠베덴의 말러가 협곡을 가로지르는 급류라면, 정명훈의 말러는 광활한 대지를 유유히 흐르는 장강(長江)의 물줄기와 같았다.
그의 음악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며 거친 물살을 일으키기보다, 장대한 강줄기가 대지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것처럼 서정적이고 유장하다.
느린 악장에서는 안개 자욱한 새벽의 강처럼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띠며, 소리 없이 흘러가지만 그 안에 깊고도 묵직한 울림을 머금고 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양 아래 반짝이며 잔물결을 만들어내는 강물처럼, 그의 연주는 절제된 흐름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의 뉘앙스를 풀어놓았다.
그러나 장강이 결코 한결같이 잔잔하지만은 않듯, 그의 말러 역시 저 깊은 곳에 흐르는 내면의 격정을 품고 있었다.
때로는 소리의 물줄기가 휘돌아 굽이치고, 때로는 강바닥을 울리는 묵직한 저음이 감추어진 힘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감정을 마구 쏟아내는 법은 없었다.
그것은 폭발하는 파도가 아니라, 조용히 흐르는 깊은 강( 정수심류 静水深流)처럼 시간과 함께 흐르며 점진적으로 커져 가는 울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5악장의 합창이 시작될 때,
오랜 여정을 따라 흘러온 강이 거대한 폭포가 되어 벼랑을 넘어 떨어지는 듯했으며, 그 순간, 음악은 더 이상 단순한 흐름이 아니었다.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장엄한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폭포조차도 강줄기의 일부일 뿐. 끝없이 흘러온 강은결국 바다와 맞닿는다.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는 끝없는 흐름, 그 안에서 격정과 평온이 녹아들며 고요한 수평선과 하나 되어 깊은 평화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명훈의 말러는 내면의 평화 속에서 마무리되며,
묵묵히 걸어가는 구도자의 길 위에선 부활이었다.
* 스스로 일어서는 부활 – 그리고 나는 다시 솔티의 말러 2번으로 향한다.
어떤 음악은 다양한 연주를 찾아 듣게 되지만, 어떤 음악은 특정 연주 하나에만 마음이 머문다.
솔티의 말러 2번 부활이 내게는 그런 음악이다.
수많은 명연주가 있지만, 나는 늘 이 한 장으로 돌아온다.
남들이 부활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
"구원은 이래야 한다." "부활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그 모든 해석 속에서도 내 취향은 단호하다. 솔티의 부활. 나는 그것이 좋다.
시간이 지나도, 삶이 바뀌어도, 나는 조용히 구원을 기다리는 부활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는 부활을 원한다.
얼마 전, 하루키의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를 읽었다.
어떻게 그는 그 음악 한 곡 한 곡에 그렇게 색다른 사연과 수많은 추억을 담아두었을까?
그러나 내가 듣는 음악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솔티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그저 듣다 보니, 자꾸 그 연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것이 내 취향 때문인지, 아니면 내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취향이란 처음에는 단순한 감각으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과 기억이 더해지고, 결국 삶의 일부가 된다.
어떤 연주가 더 깊이 와닿고, 어떤 해석이 나를 흔드는지,
그 선택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고 어느 순간 취향을 넘어, 내가 걸어온 길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애정이 된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시기는 숨 막히는 입시지옥에 갇혀 있던 고등학교 때였다.
처음에는 공부에서 도망치듯 음악을 들었지만,
이내 그 순간만큼은 도피가 아니라, 무언가를 극복하며 나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음악은 나의 현실이 되었고, 그 시절의 공기와 함께 내 안에 각인되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니체의 초인을 동경했다.
그래서일까, 힘든 순간마다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를 반복해서 들었다.
운명 교향곡은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강력한 의지의 진군이었다.
30여분, 그 음악을 듣고 나면 다시 일어설 힘이 솟았다.
반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도시의 화려하고 일렁이는 불빛 속, 길을 잃고 눈물짓는 소년 같았다. 그러나 그 소년도 결국 눈물을 닦고 다시 걸음을 내딛는다.
두 곡은 다르지만, 결국 내 감정은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것 같다. 눈물은 감정을 정화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향할 힘을 주고, 투쟁을 통한 승리는 그 길 위에서 현실을 바꿔 나가는 과정이니까.
결국, 정화 없이 승리는 오지 않으며, 승리 없이 정화는 의미를 잃는다.
그런 음악을 들으며, 나도 그렇게 다시 일어서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고요한 구원의 부활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는 부활을 원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결국 솔티의 말러 2번에 더 마음이 머무는지도 모르겠다.
* 이제 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솔티의 부활로 돌아가 보자.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거대한 여정이다.
절망과 의문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그 부활이 신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인가?.
곡은 1악장 죽음의 장송행진곡, 2악장 따사로운 햇빛, 3악장황폐화된 우리의 삶, 이어지는 4악장에서 다시 근원의 빛을 얘기하고 5악장에서 구원과 부활로 이어진다.
5악장 합창 부분 가사에서 말러는 앞서의 물음에 응답한다.
합창 1절에서는 신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지만 3절 '내가 싸워 쟁취한 것', 6절 '내가 승리해 얻은 날개'를 넘어 8절에서는 '내가 겪은 고통'이 신에게 인도한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고통이 헛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의지를 통하여 부활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솔티는 이 곡을 온정과 신비로 채우지 않는다.
그의 부활은 조용히 떠오르는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폭발하는 순간이다.
묘지의 흙이 터지고, 하늘이 찢어지며, 죽었던 영혼들이 깨어난다.
그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나는 여기 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의 연주는 처음부터 운명에 맞선다.
1악장에서 그는 죽음을 묘사하지 않는다. 죽음과 싸운다.
현악기의 트레몰로는 긴장감을 조여 오고, 저음 현악기의 단호한 선율이 장송을 밀어붙인다.
금관은 차갑게 울부짖고, 타악기는 대지를 흔든다. 삶은 애초부터 불안정한 음정 위를 걷는 것, 그 불확실한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솔티의 1악장은 고요히 스러지는 장송이 아니라, 폭발하는 죽음이고, 운명의 몸부림이다.
3악장에서 그는 혼돈과 불안을 극대화하며, 신의 구원이 없는 인간의 방황을 날카로운 리듬과 광기로 채운다.
그러나 2악장과 4악장에서는 그의 강점이 오히려 약점이 된다. 따뜻한 회상과 서정을 담아야 할 2악장은 선율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고, 4악장은 고요한 신비로움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의 해석은 지나치게 단정하고 냉정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솔티의 부활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싸우며 쟁취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마침내 5악장, 부활의 외침이 터진다.
금관이 천둥처럼 울리고, 타악기가 대지를 뒤흔들며, 합창이 폭발하는 순간, 그의 부활은 그 어떤 연주보다 극적으로 터져 나온다.
이것은 신의 구원이 아니다. 이것은 운명을 거슬러 싸우고, 끝내 승리하는 초인의 선언이다. 솔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다.
오케스트라는 무자비한 힘을 쏟아붓고, 금관은 불길처럼 타오르며, 현악은 날카롭게 도려낸다.
그의 말러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이며, 흔들림이 아니라 돌파다. 그래서 그의 부활은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운명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운명을 박차고 나아간다.
솔티의 부활에서 1, 3, 5악장은 압도적인 강렬함을 지니지만, 2, 4악장은 상대적으로 덜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연주 스타일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다. 솔티는 긴장감과 추진력, 강렬한 다이내믹과 치밀한 구조 속에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데 강점이 있다.
그렇기에 운명을 거부하며 돌파하는 1악장, 냉소와 불안이 넘치는 3악장, 그리고 극적인 클라이맥스로 터지는 5악장은 그의 스타일과 완벽히 맞아떨어진다.
반면, 서정적인 노래가 중심이 되는 2악장과 4악장에서는 그의 강점이 단점으로 작용한다.
그의 연주는 감정보다 구조, 서정보다 추진력을 우선시한다.
그의 음악에는 모호함이나 감상적인 여운이 없다.
오로지 강렬한 추진력, 명확한 리듬, 극대화된 다이내믹 속에서 압도적인 템포 감각이 살아 있다.
그렇기에 그의 연주는 긴박하게 진행되며,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향해 몰아붙이는 힘이 있다.
부활이란 죽음에서 곧 다시 일어서는 것,
솔티의 스타일이 이 곡에 어찌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도 솔티의 부활을 듣는다. 철이 지난 건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그의 부활이 좋다.
솔티 말고도 지휘자의 스타일이 명확하게 드러나 내가 때때로 즐기는 몇 개의 연주를 소개해 본다.
* 스스로 기다리며 걸어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연주(DG)
그는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걸으며 부활을 기다린다. 새벽안개가 걷히고 스며드는 깨달음 속에 구원의 빛이 열린다. 다소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 느림 속에 깊이가 있다.
* 미소로 위로하는 현자의 모습의 발터와 뉴욕필 연주(CBS)
따뜻하다. 마치 봄바람처럼 온몸을 감싸는 위로의 연주다. 발터는 연주는 늘 따듯하다.
* 과잉된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번스타인과 뉴욕필 연주(DG)
감정이 끝없이 흔들리고, 절망과 희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의 몸부림 같은 연주다. 가장 인간적인 부활인지 아니면 감정과잉의 혼란스러운 부활인지 애매모호하다.
말러 부활을 듣다 보면, 가끔 이육사의 "광야"가 생각난다.
일제강점기의 절망 속에서 쓴 시이지만, 여전히 시대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준다.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 운명을 거슬러 다시 일어서는 힘. 솔티의 부활이 보여주는 초인의 선언과도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든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 선 듦에
묵묵한 하늘이구나.
나는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KBS 교향악단 연주 / 정명훈 지휘, 2025년 2월 21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게오르그 솔티 (Georg Solti)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6, Decca)
(Solti / London Symphony Orchestra / Decca, 1966, with Heather Harper & Helen Watts, John Alldis Choir)
녹음은 당시 최고의 오디오 기술력을 동원하였기에 음질은 아주 뛰어나다. Decca 레이블의 대표적인 명연주 음반 중 하나로 남아 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xV6VwFCe968XOlL5AB-pTVcEVTK3FPSf&si=34O3i5EiKB-KOM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