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7개의 선율 - 기억 2
두 번째 글도 적다 보니, 제목부터 심각하다.
어쩔 수 없다. 나이 탓일 수도 있고, 성향일 수도, 살아온 세월 탓일 수도.
사실 운명 교향곡을 선택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을지 모른다.
이 곡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데.
나에게 운명 교향곡은 독백이며, 동시에 생의 의지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의 감정, 공기, 밤의 고요함까지, 모든 것이 이 음악과 함께 떠오른다.
때로는 퇴행처럼 느껴지지만, 이 곡이 나를 과거로 데려가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 끝에서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도 이 음악을 듣고 나면, 심지어 아플 때조차도
어딘가에서 살아갈 힘이 솟아난다.
운명 앞에서 주저하고 싶어질 때, 이 음악은 다시 내 등을 떠민다.
I. 고등학교 시절, 나를 지탱해 준 음악
고등학교 시절, 운명 교향곡은 나를 버티게 해 주던 힘이었다.
새벽까지 LP가 돌아가고,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그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이층 방에서 혼자 지내던 밤들.
가족의 상황은 복잡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혼자서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리 없었고, 어떤 말도 내 답답한 마음을 대신해 주지 못했다.
그럴 때면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렸다.
베토벤이, 혹은 그를 대신한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정확한 뜻은 몰랐지만,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이 음악은 나의 운명이었고, 나는 그 속에서 버텼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II. 운명을 듣던 대학시절, 그리고 친구와 함께한 순간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대학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클래식과는 거리가 먼 친구였지만, 내가 늘 운명 교향곡을 얘기하니 어느 날 물었다.
"너 진짜 이 곡에 미쳐 있는 거 아냐?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는 설명하는 대신, 들려주기로 했다.
공강 시간, 우리는 학생회관 3층 음악 감상실로 향했다.
집에서는 인켈 전축으로, 하숙집에서는 카세트테이프로 듣던 음악이었지만, 감상실의 오디오는 차원이 달랐다.
깊고 묵직한 소리를 뿜어내는 스피커. 탄노이였던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그 웅장한 울림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는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운명 교향곡을 선택했다.
그리고 빰-빰-빰-밤~!
첫 네 개의 음이 감상실을 가득 채웠다.
거대한 운명의 장막이 펼쳐지는 듯한 순간.
나는 오롯이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친구도 침묵했다.
30여 분이 지나고, 마지막 승리의 행진이 끝나자 감상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나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말이 없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정말 대단한 곡이네. 근데 말이야..." "내 취향은 아니다."
잠시 허탈했지만, 이내 그가 덧붙인 말을 듣고 웃고 말았다.
"난 역시 마이클 잭슨이 더 좋아. 빌리 진, 빗 잇... 이게 진짜지!"
그러고는 학생회관 계단을 내려가며 문워크를 추기 시작했다. 감상실에서의 묵직한 베토벤이 가셨다는 듯, 그의 동작은 가볍고 경쾌했다. 그날 이후, 그는 여전히 마이클 잭슨을, 나는 여전히 운명 교향곡을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는 내게 말했다.
"그래도 가끔은 너 때문에 베토벤이 생각나더라."
나는 괜히 기뻤다.
음악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작지만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III. 운명을 찾아가는 여정 - 카라얀, 클라이버, 그리고 푸르트벵글러
처음부터 푸르트벵글러의 운명 교향곡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먼저 접한 연주는 카라얀과 카를로스 클라이버였다 두 연주 모두 뛰어났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가 부족했다
운명의 본질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 고뇌하는 인간의 몸부림이 보이지 않았다.
카라얀의 운명은 너무나 매끄럽다.
그의 연주는 마치 최고의 서핑 선수가 파도를 타듯,
완벽한 균형으로 운명 위를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클라이버의 운명은 강렬한 추진력과 폭발적인 에너지로, 운명을 부수고 돌파해 나가는 듯한 연주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실존과의 싸움이며, 넘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버티며 걸어가는 과정이다.
나는 여전히, 운명과 맞서 싸우는 연주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자주 가던 음반 가게에서 낡은 흑백 사진의 푸르트벵글러의 지휘하는 모습이 담긴 CD를 발견했다.
"푸르트벵글러, 1943년 베를린 필."
전쟁 중, 6월 30일, 폭격의 위협이 도사리던 순간에 울려 퍼진 연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CD를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와 플레이어에 넣었다.
그리고 첫음이 울린 순간—전율했다.
"이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운명이었구나!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은 운명을 피하지도, 가볍게 뛰어넘지도 않는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버티고, 온몸으로 운명의 무게를 견디며 나아간다.
그의 연주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운명과 맞서는 인간의 의지 그 자체다.
전쟁이 휩쓴 폐허 속에서도,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어둠 속에서도, 그 선율은 끝내 빛을 향해 나아간다.
운명은 그렇게 멈추지 않는다.
IV. 1947년, 폐허 속에서 울린 운명
푸르트벵글러의 운명 교향곡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첫 네 개의 음이 울리는 순간, 하나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에너지, 요동치는 불안과 갈망,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해방.
나는 숨을 멈춘 채 듣고 있었고, 음악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연주를 반복해서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추체험이 되었다. 마치 어두운 터널 끝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순간처럼.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운명과 맞서는 인간의 방식이다.
다른 많은 연주들이 베토벤의 악보를 충실히 따르며 운명의 해석을 보여준다면, 푸르트벵글러는 그 음악을 통해 삶 자체를 연주한다.
다른 연주들은 서로 닮아 있지만, 그의 운명만큼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실존적 투쟁의 기록이다.
첫 소절의 전율, 4악장의 해방.
나는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어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을 여러 종류로 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1947년 연주이다.
패전 후, 그는 나치 협력자의 오명을 벗고 다시 무대에 섰다.
폐허가 된 조국, 잿빛 도시, 그리고 타타니아 궁.
그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운명 교향곡을 연주했다.
그 순간, 이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승리였을까, 절망이었을까, 아니면 처절한 몸부림이었을까?
그것은 선언이었고, 균열이었고,
이미 끝나버린 듯한 운명의 문을 다시 열고,
그 문턱을 넘어가려는 한 인간의 거친 몸짓이었다.
그의 연주는 낡은 현과 금관을 타고 흐르며, 한 시대의 상처를 머금고,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상처를 머금고 있다.
베토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 그들은 음악을 통해 시대를 연주한다.
우리는 그 순간으로 걸어간다.
베토벤이 남긴 음표들 사이로,
푸르트벵글러가 불어넣은 숨결을 따라,
그리고 1947년, 전쟁의 공기가 뒤섞인 그 자리로.
황량한 도시 위로 울려 퍼지는 선율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이것이 운명인가, 아니면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의 의지인가?"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은 그 이전에도 강렬했지만, 전쟁 이후 1947년의 연주는 더욱 절박하고, 더욱 처절하다.
그것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실존적 고뇌 그 자체다.
베를린의 폐허 속에서 울려 퍼진 이 연주는, 그 시대를 살아낸 한 인간이 남긴 거대한 발자국처럼 들린다.
V. 푸르트벵글러의 운명 - 인간의 의지로 나아가는 길
푸르트벵글러의 운명 교향곡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며, 운명과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템포 조절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인다. 특히, 운명 교향곡에서 그는 어둠과 빛의 극단적 대비를 통해, 어둠 속에서 빛으로 향하는 거대한 여정을 만들어낸다.
그의 해석은 극단적이다.
동시대 토스카니니가 “이건 베토벤이 작곡한 운명이 아니다” 라며 혹평할 정도로,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은 기존의 정형화된 연주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4악장에서 그의 연주는 단순한 승리의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운명의 힘을 뚫고, 마침내 삶을 붙잡아낸 자의 해방감이다.
그에게 운명은 단순한 박자나 음의 나열이 아니라, 고통과 갈망이 응축된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많은 운명 교향곡을 들었지만,
결국 나의 종착지는 푸르트벵글러였다.
80년이 다 되어 가는 모노, 라이브 녹음이라 음질은 거칠고, 녹음 상태는 열악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연주를 듣는다.
그 안에는 내 삶이, 그리고 내 청춘의 기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VI.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그리고 바닷가의 수도사
음악을 듣다 보면, 때로는 한 편의 시가 떠오르고,
때로는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을 들을 때면, 나는 프리드리히의 두 개의 그림이 떠오른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그리고 바닷가의 수도사.
산 정상에 선 방랑자는 끝없이 펼쳐진 안개를 내려다본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멈출 것인가, 아니면 안갯속으로 한 걸음 내디딜 것인가.
푸르트벵글러의 4악장은 바로 그 한 걸음이다.
3악장까지, 우리는 거대한 운명의 힘에 눌려 흔들리고, 길을 잃고, 어둠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리고 마침내 4악장이 터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운명의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거대한 불확실성과 맞서 싸우는 인간의 결단이다.
나는 오랫동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만 떠올렸지만,
훗날 "바닷가의 수도사"를 마주했을 때, 같은 감정을 느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인간은 도망치지 않는다.
푸르트벵글러의 연주 속에서 그는 맞선다.
버티고, 견디고, 마침내 그 파도를 넘어간다.
4악장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단순한 승리의 찬가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자의 환희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순간.
그는 운명을 외치지 않는다.
대신 단호하게 묻고, 대답한다.
"멈출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의 음악은 말한다. "나아가라."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은 느리다. 그러나 그것은 주저함이 아니다. 운명의 무게를 끝까지 받아들이려는 용기다.
그는 싸우고, 때로는 휩쓸리면서도 끝내 넘어선다.
그것은 거대한 힘에 짓눌리면서도 무릎 꿇지 않는 인간의 몸부림, 운명의 파도를 뚫고 나아가는 한 존재의 이야기다.
* 안개 바다위의 방랑자 / 바닷가의 수도사
내가 즐겨 들었던 다른 연주들
* 카라얀 / 베를린 필하모닉 (1963, DG)
카라얀의 운명은 마치 유연한 서퍼가 거대한 파도를 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정밀한 균형 속에서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으며, 현악기는 기계처럼 정제되고, 관악기와 금관 역시 흔들림 없이 정확하다. 그의 연주는 감정의 거친 흐름보다는 세련된 음향 조각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그의 운명에는 이미 예정된 승리가 존재하는 듯하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 / 빈 필하모닉 (1975, DG)
클라이버의 운명은 폭발적이고 거침없다.
그의 지휘는 빠르고 직관적이며, 빈 필의 밝고 투명한 사운드는 강렬한 리듬감을 더한다.
전체적인 연주는 철저히 감각적이며 박진감 넘친다. 그에게 운명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돌파해야 할 장애물처럼 보인다. 푸르트벵글러가 운명과 몸부림치며 싸운다면, 클라이버는 그 벽을 단숨에 부수고 질주한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강렬하지만, 인간적 고뇌보다는 운명을 힘으로 압도하는 에너지가 넘친다.
https://youtu.be/AGl_TJFzEG4?si=OMs96d8BPqWiyDL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