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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꿈, 흐르는 풍경 : 내소사에서(1부)

산행기 (4) : 내변산 관음봉에서 내소사까지의 산행기 (1부)

by 헬리오스


산행기 (4) : 2025년 5월

정지된 꿈, 흐르는 풍경 : 내소사에서 (1부)

- 내변산 관음봉에서 내소사까지의 산행기 (1부)


산은 오르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숲은 말을 하지 않았고, 절은 시간을 멈춰 세웠다.
5월의 내변산과 오래된 꽃문살, 그리고 병산서원의 강가에서 나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머무름’이라는 감정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글은 그날의 숨결을 따라 적은, 백제 무왕의꿈과 조선의 침묵 사이를 지나며, 결국 ‘나’라는 이름의 풍경앞에 멈춰 선 기억의 문살 위에서 쓰였다



안개가 막 걷힌 내변산의 아침, 하늘은 여전히 구름에 잠겨 있었고, 햇살 없는 늦봄의 공기가 산을 천천히 깨우고 있었다.

5월 말의 숲은 더 이상 피어나는 계절이 아니라, 자라나는 모든 것의 숨결을 조용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초록은 이제 더 이상 연하지 않고 숲은 자신의 초록을 숨기지 않는다. 신록의 어깨는 더 넓어졌고, 잎사귀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렸다. 그건 아마도 안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생명의 진동 때문이리라.

산은 높지 않았다. 험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느긋한 경사와 초록의 부드러움이 도리어 마음을 흔들었다. 이 산은 오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해 열려 있었다. 초록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처럼 맺혀 있었고 그늘은 빛보다 따뜻했다.

이렇게 내변산의 신록은 짙었고, 그 초록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를 감쌌다. 잎사귀 사이로 스며든 흐린 빛이 우리 둘의 어깨에 머물렀고, 바람은 땀과 함께 묵은 마음도 밀어냈다.


우리는 말없이 걷다가 때론 웃고, 문득 멈춰 서서 바람을 들이마셨다. 우리들 사이엔 서로를 재촉하는 말도, 피곤하냐고 묻는 안부도 없었다. 다만 오래된 리듬처럼 발걸음이 맞았고, 침묵 속에서도 말이 이어졌다. 함께 걷는 친구와 나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침묵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각자의 숨소리와 발걸음이 따로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나란히 맞춰지는 그 자연스러운 리듬은, 함께 산을 걷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일종의 조화처럼 느껴졌다.


세상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는 느낌, 그것이 이 산의 첫 선물이었다. 차가운 이슬기를 머금은 공기, 그 사이사이로 어깨를 스치는 신록의 숨결은 아직 도시에 남아있던 긴장감마저 한 꺼풀씩 벗겨낸다.

차 소리도, 알림음도, 해야 할 일의 그림자도 들지 않는 숲길. 우리는 오로지 지금, 걷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누구도 우리 둘을 쳐다보지 않고, 우리는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다. 서로의 옆모습을 보며, 나무와 흙과 잎사귀를 밟으며, 그저 흐르듯 걸었다. 초록은 눈앞을 덮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보다 앞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실록의 산은 한창 성숙해가고 있었고, 잎사귀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대신, 제 무게로 조용히 늘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숲은 몸 안으로 들어왔다. 단지 풍경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숲의 분자 하나가 내 혈관 속으로 들어왔다. 나의 숨이 숲을 빨아 당기고 숲이 숨을 머금으면서, 내 몸은 그 둘 사이에 겹쳐진다.


이제 나무가 내 척추처럼 곧게 서고, 풀잎이 내 모세혈관처럼 흔들리고, 바람이 나의 늑골 사이를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이 육체가 더 이상 경계가 아니라는 걸 느낀다. 몸은 산의 일시적인 입자였고, 나는 그 바깥으로 튀어나온 풀 한 포기일 뿐이었다.

시간은 멈춘 듯 느껴졌다.
계절과 계절 사이, 도시와 자연 사이, 일상과 쉼 사이, 그 어디쯤, 우리도 그런 사이에 있었다. 산은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왜 왔는지, 얼마나 걸을 건지.” 그저 길을 내주고, 그늘을 드리우고, 조용히 우리를 품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 품에, 아무 저항 없이 안겼다.

나는 혼잣말처럼 다짐했다. 오늘은 무엇도 오르려 들지 말자. 무엇도 이기려 들지 말자. 나는 그냥 이 숲의 나뭇잎 한 장으로 머물고 싶다.

물소리도 없이, 흐릿한 햇살은 조용히 숲을 흘러내렸고, 그 아래에서 내변산은 온몸으로 5월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다르다.

같은 길이라 해도,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 전혀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오를 땐 숨을 따라 걷지만, 내려올 땐 침묵을 따라 걷는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산은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고, 내가 잠시 남겨두고 온 것들도 그 숲 어딘가에서 조용히 흙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산은 품고, 나는 비워내고,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우리들은 제 자리로 돌아간다.

우리는 정상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정상의 바람은 뭔가를 일깨우기보다는, 그저 지나가라는 식의 조용한 손짓 같았다.

관음봉삼거리로 다시 내려온 뒤, 우리는 내소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파른 하산길, 숲은 다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산 중턱을 돌며 어느 순간, 불현듯 시야가 트이더니 내소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기와지붕들이 초록의 바다 위에 얌전히 떠 있었고, 낮고 긴 선의 전각들이 모여 하나의 오래된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조용한 풍경이 내 마음 어딘가를 꾹 눌러놓은 듯했다.

멀리에서 바라보는 절집은 더 이상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내소사를 둘러싼 그 푸르름은 숲의 색이라기보다는 시간의 밀도처럼 느껴졌다.



[ 이어서 2부에서 계속... ]

https://brunch.co.kr/@brunchbluesky/91

#내변산 #관음봉 #내소사 #꽃문살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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