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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들추지 않은 베일, 그 위의 마음의 무늬

연작 : 무념 1

by 헬리오스


관계 : 들추지 않은 베일, 그 위의 마음의 무늬


나는 살아가며 종종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관계의 끝을 부르는 역설적인 순간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내가 손을 내밀수록, 그 거리는 더 멀어지고

나는 무너진 자리 앞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한다.


오늘, 영국 시인 퍼시 셸리의 한 편의 시를 읽고 문득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나는 그 베일 너머를 바라보려 했던 건 아닐까.


그의 "Lift Not the Painted Veil" 시의 마지막 구절 ;

"Yet still we dare to chance / A lifting of it, for a fleeting face."

"우리는 잠시 스쳐가는 한 얼굴을 보기 위해

다시금 그 베일을 들어 올리려 한다".


이 구절은 마치 오래된 거울 속에서

내가 지나온 많은 인간관계의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어

고요하고 밝은 빛 아래에 세우는 듯했다.


나는 왜, 늘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했을까.

말 너머의 말, 미소 뒤의 감정,

침묵 속에 머문 무언가를

애써 붙잡으려 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조합하고 해석하며 그 틈새에서 진실을 꺼내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 너머에야말로 그 사람의 ‘진짜’가 존재한다고.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대신,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알아내는 일이

그를 온전히 ‘알아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래야만 더 깊이, 더 진실하게

그와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셸리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한다.

그 채색된 베일을 들추지 말라고.

그것은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세계의 유일한 형식이며,

그 너머에는

희망과 두려움이 서로를 붙잡고 흔들고 있는

눈먼 심연뿐이라고.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왜 내 몇몇 인간관계가 그렇게 가끔은 허망하게 무너졌는지를.

상대가 아직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내가 그 모습을 온전히 감당할 용기도 준비되지 않았을 때,

나는 너무 앞서 그 베일을 들어 올리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마주한 것은

당황, 거절, 혹은 무겁고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알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마주한다는 건,

서로의 베일 위에 드리운 무늬를

시간을 들여 마음을 들여 천천히 읽는 일이라는 것을.

그 무늬는 때로 왜곡되고,

오해로 얼룩지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그 무늬야말로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말해주는

작은 이야기이고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조금씩 배워가려 한다.

무언가를, 마음을 들춰보려 하기보다는,

그 앞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덜 말하고, 더 기다릴 줄 알고,

베일을 벗기기보다는,

그 위로 스친 빛과 바람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어떤 이와의 관계는 끝내 다 알 수 없어도

그 베일에 남겨진 무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사람의 진심은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자락에서 스민 시간과 체온만으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사람이 되기를,

나는 조용히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다시 바라볼 수 있기를,


우리는 끝내 서로를 다 알 수 없기에,

그 알 수 없음까지 사랑하는 법을 조용히 배워가야 한다.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

"Lift Not the Painted Veil" : 채색된 베일을 들추지 마라


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though unreal shapes be pictured there,
And it but mimic all we would believe
With colours idly spread,—behind, lurk Fear
And Hope, twin Destinies; who ever weave
Their shadows, o’er the chasm, sightless and drear.


I knew one who had lifted it—he sought,
For his lost heart was tender, things to love,
But found them not, alas! nor was there aught
The world contains, the which he could approve.
Through the unheeding many he did move,
A splendour among shadows, a bright blot
Upon this gloomy scene, a Spirit that strove
For truth, and like the Preacher found it not.


This is the world we live in. Shadows dance
Upon the wall, and some mistake for grace
The flickering light. Truth does not lie in glance
Or flame or kiss—but in the empty space
Behind the veil. Yet still we dare to chance
A lifting of it, for a fleeting face.


살아 있는 자들이 '삶'이라 부르는

채색된 베일을 들추지 마라.

그 위에 비친 형상들은 허상이지만,

우리가 믿고자 하는 모든 것을

게으른 붓질로 흉내 낸 것이지만—

그 뒤에는 두 그림자,

‘두려움’과 ‘희망’이라는 쌍둥이 운명이

보이지 않는 심연 위에

쉼 없이 그림자를 짜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베일을 들추었던 한 사람을.
상처 입은 그 마음은 여전히 다정했고,
사랑할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가 긍정할 만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무관심한 사람들 사이를 그는 걸었고,
그들 속에서 그는 찬란한 얼룩,
어두운 무대 위에 찍힌 눈부신 얼룩처럼 빛났다.
진실을 향해 싸워간 하나의 영혼—
그러나 설교자처럼 그 역시 진실을 찾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림자들이 벽 위에서 춤을 추고,
어떤 이들은 그 깜박이는 빛조차
은총이라 착각한다.
진실은 눈빛 속에도, 불꽃이나 입맞춤 속에도 있지 않다.

진실은 그 베일 뒤의 텅 빈 공간에 머문다.

그럼에도 우리는—
잠시 스쳐가는 한 얼굴을 보기 위해
다시금 그 베일을 들어 올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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