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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했던 소심쟁이, 소신쟁이

by 정썰

타고난거다. 지금은 세월에 닳아 나아진 편이지만 어릴 적 동네 할아버지를 피해 다니던 기억이 또렷하다. 나름 동네에서 인사성 밝기로 유명하고 싶었던 꼬마는 동네 어르신들을 마주칠 때 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딱 한 분, 바로 앞에서 인사를 해도 눈짓 한 번 안하시고 지나치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연세가 꽤 드셨고 무척 마르신 것이 인지력이 많이 저하되신 상태였는데, 그 당시 어린이에겐 커다란 부담, 요샛말로 하면 마상꺼리였다. 동네 골목이 좁고 길어서 자주 마주치던 그 할아버지. 어느새 난 멀리서 할아버지의 아우라가 비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굽어진 골목길이나 전봇대 뒤로 숨고는 했다. 인사를 하자니 마상이고, 안하자니 착한 어린이 위상에 금이가는 일이기에 안부딪치려 했다. 참으로 소심했던 꼬맹이. 특전사는 이런 소심쟁이를 담대하게 변화 시켰다. 매일 훈련하고 운동하니 몸은 단단해졌고, 휴가 때 대학생들과 3:3 농구를 해보면 체력은 남고도 남았다. 이 신체적 허세가 극대화 된 시기에는 길을 걷다가도 ‘누구 하나 어깨만 스쳐봐라’하는 객기가 스멀거리기도 했다. 몸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 했던가?(안했으면 내가 한다... 그런데 쓰고 나니 앞뒤가....ㅋ) 아무튼 몸이 좋아지면서 마음을 견인하기 시작했는지, 그 시기에 난 참 당당했다. 3년간의 팀장 역할을 마치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따로 한 꼭지를 할애하기로 한다) 여단 정보처 실무장교로 있을 때였다. 독수리 훈련 이었던가? 2주간의 전쟁연습 기간동안 난 정말 혹사 당하고 있었다. 특전사 임무의 특성상 전쟁 초반부에는 임무가 없이 상황을 유지하는데, 이 시기에는 간부교육이 주를 이루었고, 적 정보가 중요한 부대 특성상 난 매일 간부교육 자료를 한 두개씩 만들어 브리핑 해야 했다. 2주간의 내 일과를 생각해 보니 절반은 주간에, 나머지는 야간에 상황실에서 간부교육 및 상황 유지, 교대 후에는 교육자료 만들기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지쳐가고 있었다. 2주간의 훈련이 끝난 토요일 오후, 날을 꼬박 세운 난, 숙소로 달려가서 씻고 라면 한 그릇 끓여먹고 푹 자고 싶었다. 그 때 참모부 건물에 울려퍼지는 전달사항. 여단 연병장에서 간부 축구를 한다는... 웅성거리는 불만의 소리들이 복도를 타고 방송의 메아리처럼 흘렀다. (어쩌면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참모님의 긍정 마인드에 따라 피하지 못할 고통(?)을 즐기러 일빠로 연병장으로 나갔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방어전을 훌륭하게 마쳤다. 샤워를 마쳐갈 즈음 2차 공습 방송이 흘렀다. 간부식당으로 집합! 여단장님께서 베푸시는 삼결살 회식!! 식당에선 거나하게 취한 참모부 간부들의 용비어천가가 풍악처럼 울려퍼지고 난 속이 안좋아서(분명 신경성 증상 이었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고기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그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분위기와 시간이 회식의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정보처에 남다른 자부심과 부하를 아끼시던 우리 참모님이 일을 내시고 말았다. 얌전히 고기만 먹던 날 지목하시며 훈련기간 가장 고생한 정대위 소감을 마지막으로 듣자는 제안. 그렇다 내가 정대위다 내가 조선의 국모... 아니 여단의 삐딱이다. 그냥 기회 주심에 감사하며 여단장님을 향한 맘에도 없는 흠모의 너스레를 떨면 기분 좋게 끝날 그날의 회식을 갑분싸로 만든건 나였다. 일을 낸건 참모님이 아니었다. 피끓는 특전사 대위, 여단장님의 출신 차별을 몸소 느꼈던 서자 출신의 학군장교(R.O.T.C.)였다.

좌중을 혼돈 속으로 몰아 넣었던 내 소감은 이랬다. ‘2주동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쉴 틈도 없었지만 그래도 훈련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훈련 종료 후 축구를 한다니 몸과 마음이 지친지라 이걸 왜 하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비 맞으며 땀을 흘리니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간부들이 술 한잔에 피로도 풀고 고기도 맛있어서 좋았습니다.’ 눈치 챘겠지만 ‘그래도’ 앞 문장이 내 진심이고, 이후는 미사여구였다. ‘2주간 여단장님의 훈련 방식에서 느낀건 여단장님이 냉혈한이라는 겁니다.’ 그렇다. ‘냉혈한’이 내가 느낀 그 분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나도 매너가 있는 장교였다. 차마 하늘의 별을 상대로 그런 천박한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피가 차가우신거 같습니다.’라고 부드럽게(?) 말을 마쳤다. 말을 안했으면 안했지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갑분싸~ 이 분위기 어떻할래? 네 남은 군생활을 어떻할래? 라는 분위기를 호쾌하게 깨부순건 여단장님이셨다. 그 긴 다리를 꼬시면 허리를 곧추세우시고 ‘하하하, 지휘관 마다 트레이닝 방식이 다양하지, 내가 좀 하드한거 인정. 힘들었겠지만 배운게 더 많았을 거야. 잘 따라와준 간부들에게 감사’ 대략 이런 내용으로 클로징 하시고 박수를 유도하고 쿨하게 (내 생각엔 쿨 한 척) 식당을 나셔셨다.

다음날 젊은 선배 몇몇은 날 ‘차가운 피’로 불렀다. 지금 생각하니 진정한 비아냥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난 소신쟁이로 살지 못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내 맘속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아니 몇 번 하다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거짓말도 하게 되었다. 계급이 하나 높아졌는데 장교다운 기개는 그에 반비례로 줄어 갔다.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전역을 결심하게 된다. 그때가 정점이었다. 청년장교의 푸르름이 찬란했던 시절. 난 뜨거운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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