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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공범

5만 원을 잃고 나는 우네...

by 정썰

일이 벌어지려면 늘 그렇다. 그랬다. 하인리히 법칙을 갖다 붙이기엔 좀 과하고, 머피의 법칙으로 설명하기엔 좀 복잡하지만 어쨌든 어제저녁, 일은 벌어졌다. 무엇을 잃어버리면 늘 후유증이 남는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내 애착의 정도, 경제적, 시간적 경중에 따라 크기와 길이가 다를 뿐.

글쎄... 사건의 단초를 어디로 삼아야 할지 몰라서 시간적 선후관계로 전개해 보자. 요즘 백 주부 랜선 제자로 요리에 흥미가 생긴 중3 아들이 점심 메뉴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였다. 맛있게 먹고 남겨두었다. 아내가 퇴근하자 난 저녁으로 아들 표 김치찌개를 권했다. 아내는 김치찌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꾸 까먹는다. 결혼 17년 차, 아내의 취향이 늘 새롭다.) 미안함에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아내의 음식 취향을 떠올렸다. "김천 김치 볶은밥 먹을래?" 분식집 김볶. 밥류중 아내의 최애 아이템. 통했다. 아내가 전화로 김볶과 왕돈가스를 주문하고 난 집 앞 가게로 픽업 갈 준비를 한다. "내가 현금 줄게" 보통 때라면 난 "그냥 내 카드로 할게" 했을 거다. 그런데 난 그날 아침, 옷방을 청소하다 책장 사이에 놓은 오만 원권 지폐를 본 기억이 나서 "그래" 하고 지폐를 받아 들었다. 걸치고 있던 조끼 주머니에 넣고 옷장을 열고 롱 패딩을 꺼낸다. 아침에 달리기 할 때 무척 추웠던 경험이 거리에 비해 둔탁? 한 옷을 선택한 것이다. 옷을 입고 지퍼를 올리다 문득 조끼 주머니에 든 지폐가 걸렸다. 계산하려면 이 기다란 지퍼를 다시 내렸다 올릴 생각에 옅은 전율을 느끼며 지폐를 외투의 주머니로 옮겨 넣는다. "과자도 좀 사 올까?" 어젠가? 입이 심심한데 뭐 먹을 게 없다며 아쉬워하던 아내가 떠오른 거다. "그래"

현관 어귀에 쌓아 둔 분리배출 쓰레기들을 들고 엘베 버튼을 누른다. 숙련된 솜씨로 짧은 시간에 분리배출을 마치고 분식집으로 향할 때까진 전혀 몰랐다. 그 날의 비극이 생길 줄은...

원래 계획? 은 이랬다. 분식집에 가서 지폐로 계산을 하고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과자를 사 오자. 그런데 마트 앞 도로를 건너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밥을 들고 마트에 가서 과자를 고르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 가볍게 과자 먼저 사서 분식집으로 가자. 분식집에서 바로 오라고는 했지만 혹시 또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고... 아내가 좋아하는 '브이콘'을 두 개 사고, 아들 녀석 줄 과자 서너 개. 계산기 액정에 찍힌 몇 천 원을 보는 순간 두 번째 변심. 지폐를 고이 모셔두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계산을 한다. (정기사가 왜 그랬을까...ㅠㅠ) 가벼운 마음으로 마트를 나서서 분식집을 향하면서 주머니 속 지폐를 확인한다. 종이의 질감이 좀 이상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변수. 보통 계산이 끝나면 캐시어 누님들은 "영수증 드릴까요?"하고 물으시고 난 "아뇨"라고 대답하고 나오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유독 그날 누님은 아무런 질문 없이 영수증을 내밀었고, 난 또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주머니에 휴대폰과 함께 구겨 넣었던 것이다. 이게 지폐야, 영수증이야? 왠지 모르게 무뎌진 손끝으로 영수증을 밀어내고 더 깊숙이 손을 넣어 더듬어 본다. 어... 없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낼 아침에 먹을 빵도 사갈까?"라며 통화를 하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어? 어디 갔지?" "뭐가?" "도.. 돈이 없어졌어" "뭐? 뭐가 없어졌다고? 어딘데? 분리수거장에 떨어뜨린 거 아니야?" "아.. 아니야" 분명 그건 아니었다. 마트를 들어가며 난 분명히 손끝으로 돈의 안전여부를 확인했으니까. 아차차 돈을 꺼낼까 하다 휴대폰으로 맘을 바꿔 꺼내면서 지폐가 딸려 나와 떨어졌을 거다. 그렇다면... 난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마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허둥지둥하지 말자. 최대한 쿨하게... 내가 지아온 과자코너를 돌아 눈 수색을 마치고 케시어 누님께 물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은 그날 사건에서 유일한 긍정적 요소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법칙이 통했다.

밥을 찾아 돌아오는 길에 분리수거장에서 아내와 조우했다. "에휴, 내가 애한테 심부를 시킨 것도 아니고...", "오만 원 벌려면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데...", "CC-TV 확인해 봤어?"

더 한 말도 참아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많이 참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코로나니 뭐니 해서 수입이 형편없이 줄어든 이 시국에, 대방어 철이라고 큼지막하게 걸린 횟집 선전문구를 보면서, 아들 녀석이 대방어 좋아할 텐데... 하면서도 '좀 비싸네'하고 미뤘었는데.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난 학원 다녀온 아들 녀석을 옆에 앉히고 사건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현금을 주지만 않았어도, 아니 내가 평소처럼 받지 않았으면, 아니 마트에서 그냥 현금으로 계산을 했더라면, 아니 계획대로 분식집에 먼저 들렀더라면, 아니 아내가 그냥 김치찌개랑 저녁을 먹었더라면... 별의별 가정이 난무하며 결국 자학 모드로 돌아서려던 찰나. 난 내달리던 부정적 감정의 블레이크를 밟았다. 생각해 보니 찾을 수 없는 돈 오만 원 때문에 저녁시간 이후의 내 감정과 집안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유현아 아빠는 마트에서 흘린 아빠 돈이 경제적으로 좀 더 어려운 분이 주워갔으면 좋겠어. 끝!!" 가식적인 진심으로 난 눈에 아른거리는 그분의 초상을 지웠다.

직업군인 생활 15년을 마치고 10년을 소위 보험설계사로 살았다. 정직한 회사, 원칙과 비전이 살아있는 회사라는 선배의 권유에 제법 과감하게 투신했지만 입사 후 꽤 오랜 시간을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싶었다. 수차례의 고비를 넘기면서 지난 10월 입사 10년을 지나면서 난 초라함을 느꼈다. 누군가는 억척스럽게 쌓아 올린 커리어도 돈도 없이 계속 적응하면서 보낸 듯한 10년. '잃어버린 십 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지난 십 년의 의미는 앞으로 살아갈 10년이 정할 거라는 것을. 그랬다. 그럴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두고 평가할 때 중간에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결국 내 삶의 과정이다. 오만 원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고 바보 같은 날 자책하고 두고두고 그 날에 벌어진 일들을 복기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길다. 그 날, 완벽한 공범들의 목적은 내 돈 오만 원이 아니라 그걸 잃고 속상해하며 그 속상함의 감정을 전파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공의 목전에서 아쉬움에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또 무언가를 공모할 것이다. 그 계획이 언제 또 엄습할지 모르지만, 난 오늘 선전포고 한다.

'헛수고들 하지 말고, 다신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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