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4/월/맑음.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안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황해문학> 2017 겨울
서른, 잔치는 끝났다던 시인의 ‘선운사에서’에 빠져 며칠을 살기도 했다. 그 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시인의 시. 우연히 다시 접했다. 괴물시인은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지금도 언급되는 걸 보면 괴물은 괴물인가 보다. 똥물을 쏟아내는 괴물.
이곳저곳 괴물 천지다. 저 위쪽 산자락에 용처럼 기세등등한 이무기도 괴물.
몬스터주식회사에 등장하는 괴물. 야구가 좋아 다시 뭉친 괴물들. 귀엽고 즐거움을 주는 괴물도 많은데.
월요일. 최강 몬스터즈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괴물들은 사라지고 괴물들만 함께 즐거웠으면...
착한 괴물들만 키웠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