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완생 #갓생 #삶 #죽음 #save9 #장례 #설명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홍시를 떠 넣어/ 드려도/ 게간장을 떠 넣어 드려도/ 가만히 고개 가로저으실 뿐,/ 그렇게 며칠,/ 또 며칠,// 어린아이 네댓이면 들 수 있을 만큼/ 비우고 비워 내시더니/ 구십 생애를 비로소 내려놓으셨다.’ - 완생(完生) / 윤효
미생으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비우고 비워내는 일이 완생을 향한 길이라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하다.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고, 단 맛, 쓴 맛, 마침내 매운맛 다 본 거 같다. 그래도 앞으로 또 어떤 도전과 응전이 또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 반 걱정반. 설마 더 한 고난이 있을까, 설령 있다한들 또 이겨내지 못할까, 시건방도 좀 생겼다.(급 반성하며 ‘겸손’ 삼창 완료)
15년 군생활을 정리하고 미국계 보험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운명처럼(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엮인 선배가 2년 정도 귀찮을 정도로 권해왔고, 회사의 철학과 문화에 끌려 '라이프플래너'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 때 이른 유언장을 쓰게 되었다. 'Love letter'라는 명칭이었지만, 종신보험금과 함께 유가족(수익자)에게 전달되는 글이니 유서였다. 난 이런 회사의 문화도 맘에 들었다. 진지하게 작성하는 고객들을 지켜볼 때면 군복 안에서 느꼈던 사명감 비슷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각설하고, 그때 쓴 글을 본사에 등록을 해 두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고, 첨삭하여 다시 유언장을 써 둔다.
명! 현! 고마워. 자칫 큰 의미 없이 살다 갈 인생. 그대들 덕에 남편이라는, 아빠라는 이름을 잘 빌려 쓰고 가네.
우선,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심장, 간장, 신장 2개, 폐장 2개, 췌장, 각막 2개를 기증하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따로 장례절차 없이 쓸만하다면 몸뚱이까지 연구용으로 보내기 바라. 그래도 좀 아쉬우면 백수잔치를 마련해 주렴(목표가 백 살인데, 햇수가 좀 모자라도 이 명칭을 써주길). 뷔페 메뉴에 연어랑 치킨은 빼먹지 말고, 분위기는 경쾌했으면 해. 네 돌잔치 정도 참고하면 될 거 같아.(아, 그건 기억하기 힘들겠지? 여느 돌잔치 처럼 해줘) 배경음악 플레이리스트는 미술학원 마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함께 듣고, 때론 따라 불렀던 노래들이면 좋겠어. 그림을 남길 테니 식장 주변에 전시해 주고, 혹시 구매의사가 있는 분들께는 판매해도 좋아.(그럴 리 없겠지만, 수익금은 기부하고)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는 내가 만들어 둔 영상으로 하고, 식사 중간 스크린에는 SNS에 올려둔 사진과 동영상을 쓰면 될 거 같아.(여력이 되면 따로 만들어 둘게) 식사 맛있게 대접해 드리고 돌아가시는 길에 아빠 책하고 적절한 답례품도 준비해 주길. 지급된 종신보험금 천만 원 한에서 계획하고 추가적인 비용은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장례식이 아니니 부의금 받지 말고. 유골은 해부실습이 끝나면 1~3년 후 준다고 들었어. 해남땅에 수목장 형태로 묻어주면 되지 않을까? 부디 슬퍼하지 말고, 잘 살다, 잘 돌아가니 즐겁게 보내주고,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해 주길. 아, 나무는 네 엄마 좋아하는 사과나무로 해주고(지역적 조건에 맞는지 모르겠다) 묘비 대신 작은 푯말에 'Carpe diem & Amor fati!!' 새겨주면 깔끔하게 끝날 거 같아. 크리스천으로 살게 해 준 내 아내, 소중한 친구가 되어준 아들, 아빠 삶의 증거가 되어줘서 고마워~^^'
(인생, 알 수 없지만) 아직 긴 세월이 남았고, 유언장은 간간히 수정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 잘 죽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 산티아고순례길 종주, 연명치료 거부 신청, 글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 만들기(이게 가장 난제다), 행사 시나리오 쓰기 및 영상 만들기, 짬짬이 준비하면서 '갓생'(God과 人生을 합한 신조어. 하루하루 계획적으로 열심히 살아내는 삶을 의미)을 살아내다 보면 낙제점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날이 풀리자 아파트 마당에 실금이 또 하나 늘었다./ 어제는 비까지 내려 더 아프게 드러났다./ 풀리지 않는 일 탓이겠으나 심란했다./ 손바닥에 자주 눈이 갔다./ 내내 뒤숭숭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풀 죽을 일이 아니었다./ 실금을 따라 푸른 것들이 일제히 돋아나 있었다.’ - 생명선 / 윤효
문득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살아온 날 만큼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조금 여유 있게 주셨으면, 그리고 아내에게 좀 더 주셔서 아내가 내 유언장을 읽을 수 있었으면..
p.s. 갑자기 든 생각인데, 멋진 시 한 편으로 유언장을 대신 하면 어떨까? 급조한 제목은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