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에 대한 시기보다 더 큰 질투는 없어

사랑은 받았지만 조언은 받지 못한 사춘기 나에게

by 내일의꿈

십여 년 만에 다시 손에 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잘 읽히지 않아 쿠팡플레이 켰다. 쿠팡플레이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클릭했다. 영상미와 의상이 아주 뛰어나고, 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19세기 러시아 배경의 여주인공 안나는 귀족사회에서 부족함 없이 결혼 생활을 하던 중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진다. 아들과 남편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지만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비난을 받으며 점점 고립과 불안 속에서 흔들린다. 영화의 여운이 머릿속에서 떠나기 전 안나의 나이가 궁금해서 검색해 봤다. 안나는 초등학생 자녀가 있고 두 번째 격정적인 사랑을 했음에도, 아직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었다.

설날 연휴에 결혼 언제 하냐고 핀잔 듣고, 하루 종일 먹고 낮잠 자고, 누워서 숏츠랑 유튜브만 보다 영화 한 편 집중한 게 오늘 하루의 최대 업적인 나는 삼십 대 중반이다. 그렇기에 죄책감에 시달려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러 왔다. 다음 글의 주제가 '행복한 가정에 대한 시기보다 더 큰 질투는 없어'라고, 작년의 내가 계획해 두었다.


우연이 참 묘한 게,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아래와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행복한 가정은 큰 장점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공통점은 큰 단점이 없거나, 큰 단점을 극복해 나갔다는 점이다. 불행한 가정은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주제로 삼아둔 나 또한 저마다의 방식과 사연을 지니고 있나 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나? 중학생 때였나?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우셨다. 나는 꿈인 줄 알았다. 자고 있던 나를 껴안고 잠시 흐느끼시더니 다음날 보이지 않더라. 몇 달 뒤 학교에서 최근의 고민을 적는칸에 '가정이 조금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연필을 눌러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물론 사랑받고 자랐지만, 부모의 조언은 없이 자란 것 같다. 나는 부모에게 기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베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냥 우두커니 혼자서 돈 벌고 공부하고 정보를 찾고 내 미래를 설계했다. 부모가 무언가를 반대한다는 개념을 알지 못 했다. 어차피 스스로 결정하고 혼자 행동하면 되는데 부모님한테 도움을 받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낯설었다. 청소년기의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했고, 누군가에 도움이 필요한 일은 그냥 안 했다. 물론, 지금은 다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질투했다. 부모님이 싸준 이쁜 도시락을 싸 온 친구들, 학원 끝나면 자연스럽게 데리러 오는 차를 타는 친구들. 본인의 진로와 미래를 조언받는 친구들까지. 그때는 질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 감정은 질투였다.


원래 비교할 의도로 글의 제목을 지어둔 건 아니겠지만, 서른의 '안나'는 본인의 가정을 본인의 손으로 무너뜨렸지만, 서른의 '나'는 가정에 대한 생각은 아직 과도기에 남겨져 있다.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갈지, 과거의 기억과 화해할지, 아니면 나의 미래를 만들어갈지.


정리되지 않고 민망한 나의 글과 감정을 나이브하게 GPT에 집어넣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내가 스크립트를 쓰는 법을 몰라서 그런지, 내 글이 너무 엉망이라 그런지 GPT의 답변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나는 '머무름'에 대하 말하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제 뭔가 선택을 하라고 하긴 하는데 답변이 맘에 들지 않고 추상적이라 옮기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이번엔 AI 말고 나에게 묻는다. 방금까지 쓴 글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답 한다. 아직 내 가정을 만들지 않아서 '행복한 가정을 질투'하던 십 대의 나에게 아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다만 그럼에도 한 마디 해야 한다면

'그때의 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 같은데?'

라고.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도말해주고 싶다. 이십 년 뒤의 나도 삼십 대의 나에게 동일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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