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삭아버려
손에 쥐니 퍼석하게 바스러진다
그리고 이름 모를 바람에 조금씩 쓸려나간다
옅어진다
여기, 나는 그 이야기를 한올씩 모아
주워 담고 있다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나열된 글자들이 이글거리는
이 끄적임에도 이름을 붙여본다
그러니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할 수 있겠다
그 이야기 속에서
영혼과 끝을 구분할 수 없으니
우리는 그걸 운명이라 칭한다
보통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사포처럼 거치르며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또한 밤바다를 보는 것처럼
가슴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꽤나 새침한 하루 속에서
겨우 무엇을 건져낼 수 있을까
무엇을 건져내야만 하는 걸까
옅게나마 들려오는 깊은 노래가
피부에 닿아오면
나는 생각하는 거다
결국 그 노래를 듣지 않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니 나는 계속 종이 위를 적실 거라고
마치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