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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지 않는 돈

루마니아의 시나이아

by 카렌

루마니아 초대 왕, 카롤 1세가 조카에게 왕 위를 물려준 기록을 보고


왜?


라는 질문을 하며 걸었다.


자식이 없었나? 있었다면 그랬을 리가 없다.


신하들의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됐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조카를 위해 펠레쇼르 성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다.


펠레슈 성 옆에 있는 펠레쇼르 성


그래도 왕위까지 물려주는 것은 어쩐지 좀 의문스러웠다.


루마니아의 초대 왕인 그가 독일인이라는 것도 좀 그랬다.


페루에서는 일본인 후지모리가 10년간 대통령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부패와 비리로 물러난 다음에도 그의 복귀를 바라는 국민들이 많았다던데 그런 예외적인 것들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하나. 그러니까 우리나라 초대 왕이 일본인이라면 어색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펠레슈 성이 보이는 데도 그곳의 정문에 이르는 길은 길고도 멀었다.


정문으로 바로 향하게 길을 만들지 않고 돌아서 길게 정문으로 이어지게 했다. 마차를 타는 왕이나 귀족에게는 상관없었겠지만 하인이나 평민들에게는 무척 지루한 길처럼 보였다. 특별한 일 없는 여행자가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길이었다. 양 옆으로 큰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서 있었고 곁으로 큰 냇물이 흘렀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계절에는 더욱 아름다울 것 같았다.

펠레슈 성을 세운 것은 카롤 1세고 루마니아는 이 성을 남대문처럼 국보 1호로 지정했다.


루마니아인들은 이방인처럼 보이는 카롤 1세를 지금도 무척 존경하는 것 같다. 내 가이드북에 따르면 말이다. 그는 루마니아가 오스만 지배를 받았을 때 루마니아 해방을 위해 싸웠고, 철도 산업을 장려하여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시나이아를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대학을 세웠고 가치 있는 건물들을 세워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펠레슈 성에 도착했지만 입장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었기 때문이었다. 늦은 산책을 시작한 터라 이미 짐작하고 각오한 일이었다. 근처에 있는 펠레쇼르 성을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국왕과 두 번째 국왕의 여름 별궁이었던 성들은 잠시 공산주의자들이 차지했다가 그들이 물러간 후 다시 왕실 차지가 되었다. 가이드북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려야 했을 때 예감하고 있던 또 다른 문제가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다.


뱃속에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펠레슈 성이 보이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 조짐이 왔다. 늦은 점심으로 먹은 라면을 제대로 씹지 않고 넘겨서거나 빈속에 들어간 라면 국물이 자극적이어서일 거라 생각했다.


급히 발길을 돌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갔다. 호텔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의 거리였다. 식은 땀으로 속옷이 젖는 것을 느꼈다. 급할 때마다 주먹을 쥐고 엉덩이를 몇 번씩 두드렸다. 그렇게 하면 효과가 있었다. 최소한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내심이 더 생기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걷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공중도덕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상황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산책로에는 이렇다 할 조명이 없어서 어두웠고 냇물 쪽에는 몸을 숨길만 한 숲이 있었다. 사람도 없었다. 길에는 개똥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기에 내 것 하나 섞인다고 티가 날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휴지였는데 그것의 대용품은 머릿속에 쉽게 떠올랐다. 지갑 속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루마니아 지폐들이었다.


나는 냇가로 내려가서 재빨리 엉덩이를 깠다. 내 속의 것들은 순서를 지킬 줄 몰랐다. 서로 밖으로 나오려고 다투는 바람에 그런 이전투구가 없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진격 명령을 받은 군인들처럼 팡파르도 규칙 없이 울려댔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다행히 졸졸 흘러가는 물들이 그 소리를 안고 지나가 주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성을 밝힌 불빛이 여기가 어딘지 말해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지폐들을 골랐다.


불행히도 1레이가 없어서 5레이부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양손에 쥐고 구겼다. 그런데 너덜너덜해지는 맛이 없었다. 그때 루마니아 지폐가 다른 나라 것에 비해 유독 매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마니아 지폐가 구겨지지도 물에 젖지도 찢어지지도 않는 폴리머 재질로 되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다. 10레이도 구겨보고 500레이도 그렇게 해보았지만 더 이상 성질을 바꿔볼 재주를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밑에 대고 할 일을 했는데 계속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얼음 위를 맨발로 미끄러지 듯 그렇게 잘.


똥값도 못하는 것들이라고 나는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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