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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야

루마니아의 시나이아

by 카렌

해가 지고 있었다.


잠시 산책을 다녀와 책을 읽었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 도 이제 얼마나지 않았다.


이 도시의 노인처럼 벤치에 앉아 있는 일은 심심했다.


프라도가 좋아했던 단어 중 하나는 ‘허무’라고 한다. ‘허무하다’.

나도 동의하지만 이 단어는 사람을 우울한 쪽으로 이끈다. 가끔 허무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놀라곤 한다. 그들 삶에 그런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내가 갇혀 있던 언어의 세계를 반성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남들도 나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부자인 아버지를 갖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산책길에 내가 말했다. 그런 아버지를 갖는다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겠지? 그게 좋은 것 같다고 제이가 말했다.


- 죽을 때 많은 돈이 남는다면 억울할 것 같아.

- 왜?

- 돈이란 시간과 바꾼 거잖아. 사용해보지 못한 시간이 쌓여 있을 거라 생각하니 끔찍한데.

-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나를 비웃으 제이 말했다.

- 돈 쓰기가 얼마나 쉬운데.

앞으로 걱정하지 말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호텔에 들어와 제이는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물을 끓여 코끼리(물주머니)에게 먹인 다음 제이의 이불 속으로 넣었다. 나중에 다시 이불을 덮어 주다고 보니 침대가 뜨끈뜨끈했다.

잠시 눈을 뜬 제이가 말했다.


- 따뜻해.


이토록 바라는 게 적은 제이가 고마웠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이 내게 많은 것을 바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프라도 역시 남들이 갖는 기대를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그가 부유한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에 제법 다른 생각을 마음껏 펼치며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프라도는 리스본행 야간 열차에 등장하는 인물.


프라도가 여기 저기 남긴 글들은 인상적이다.


방금 그레고리우스가 마리아 주앙에게서 받은 봉투를 뜯었다. 프라도는 그것을 자신이 죽은 다음 마리아 주앙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자신의 동생인 아드리아나가 읽어서는 안 된다는 부탁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 주앙은 그것을 읽지 않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인 이유는? 어느 순간엔가 모든 사람이 하는 질문이다. ……왜 우리는 우연이 사랑의 의미를 축소한다고, 우연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사랑을 폐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소. 그런 섭리도 없을뿐더러 서로의 운명이 맺어지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도 없으니까. ……우연의 변호인이 사랑을 덜 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가 부족한 것도 아니라오. 오히려 더 많이 한다오.”


557쪽이었다.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도록 페이지를 접었다.


나도 그처럼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은 그저 우연의 화려한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우리의 만남도, 여행도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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