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의 플로브디프
구시가지로 여행을 했다.
가이드북도, 지도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었다. 지도와 가이드북을 쳐다보면서 이게 이건 지, 그걸 확인하면서 여행하는 것에 질려 있었다. 그냥 산책하듯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 건물이 무얼 의미하고 역사적으로 어떤 것인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걸으면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구시가지로 생각되는 곳의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먼저 신시가지의 큰 길을 따라 걸었다. 중앙우체국을 지나고 여행자 안내소를 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지하로 움푹 들어간 유적지 하나를 발견했다. 로마 원형 경기장이었다. 그 옆에 뾰족한 첨탑 하나를 가진 드주마야 모스크, 그 옆 쪽에 성모 마리아 정교회가 있었다.
큰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가 우리는 지하도를 발견했다.
이 도시의 별명 중 하나가 화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런 별명답게 지하도의 벽에는 무명의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로 가득했다.
- 이런 것을 그래피티,라고 하나?
- 응. 그렇게들 말하지.
- 근데 그렇게 상쾌한 느낌은 아닌데.
- 낙서라고 생각하는 거야?
- 그래피티, 번역하면 낙서화 아닌가?
- 아니야, 그래피티는 그냥 그래피티일 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제이가 웃었다.
스프레이와 페인트로 그려진 그림들과 글자, 그것들이 뽐내는 색깔들은 분명 강렬하고 활기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벽면 전체의 느낌은 정돈되고 안정된 느낌이 아니었다. 들떠 있었다. 뉴욕에서 시작된 그래피티의 창시자들이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은 이런 들뜬 느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의 강렬하고 활기찬 이미지는 곧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뉴욕 경찰은 이들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했고 그럴수록 예술가들의 인기는 높아졌다. 마침내 그들은 키스 해링 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 키스 해링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
- 들어는 봤지.
내가 대답했다.
키스 해링은 그래피티를 통해 인종차별 반대, 핵전쟁에 대한 공포, 에이즈 퇴치 등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사회에 던진 인물이다. 재치와 유머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지만 서른두 살을 채우지 못하고 안타깝게 에이즈로 죽었다.
불가리아의 그래피티가 유쾌하지 않게 다가온 것은 키릴 문자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피티의 특징 중 하나가 유머인데, 그것을 구사하는 언어를 읽을 수도 뜻을 알 수도 없으니 더 막막해졌던 것이다.
- 그래피티의 시작은 현대의 뉴욕이 아니야.
- 그럼 어디야?
내가 물었다.
- 그건 나도 모르는데, 구석기인들의 유적지에서도 낙서에 가까운 그림이 발견되기도 하거든. 구석기인들이 그린 그림을 낙서화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도 그래피티의 범주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지하도를 벗어나자 우리는 곧 과거에 속하게 되었다.
돌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자 전통가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옛집들은 1층보다는 2층이, 2층보다는 3층이 넓어지는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가분수 모양이었는데 1층에서 툭 튀어나와 2층을 떠받치는 곡선의 나무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집들을 게스트 하우스로 만들어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 게스트 하우스의 한 곳을 바라보다가 나는 비로소 에어비앤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베드와 블랙퍼스트. 침대와 아침이었다. 근데 왜 우리 숙소에서는 아침을 주지 않는 거지,라고 묻자. 제이가 말했다.
- 우리 숙소 간판에는 베드라는 안내만 있어.
구시가지의 여러 숙소들을 지나면서 제이는 재밌는 규칙을 가진 곳에 대해 말해주었다.
어떤 곳에서는 주인이 보증금을 받고 규칙을 어기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숙소를 운영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그런데도 담배를 폈다면 보증금은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 뭐뭐 해서는 안 된다가 많은데 특이한 규칙을 가진 숙소가 하나 있다고 했다.
만일 이곳에서 3일 이상을 머문다면 나는 친절하게 당신에게 부탁할 것입니다.
꽃에게 물을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집주인이 참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