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NATO의 공격을 받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텔 직원은 그곳이 무척 가까운 곳이라고 지도를 펼쳐 설명해주었다. 그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번갈아 교차시키며 걷는 시늉을 했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무너진 두 건물이 마주하고 있었다. 건물을 남겨둔 것으로 보아 잊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을? 아마도 그건 미국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지도를 펼쳐보면 세르비아의 아래쪽에 코소보가 보인다.
이상한 것은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의 국경선이다. 실선이 아니라 점선이다. 점선은 한 국가 내의 행정구역을 나눌 때 쓰는 것이다.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신들 나라 일부로 보고, 코소보는 당당히 독립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없을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코소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충분하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원지이며,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가 처음 세워진 곳이다. 오스만 튀르크가 발칸을 침략했을 때 끝까지 저항한 민족은 세르비아인인데 그 마지막 전투 장소가 바로 코소보였다. 1389년 세르비아의 라자르 왕자는 무라드 1세와의 전투에서 패한다. 하지만 그 전투는 많은 설화들을 만들어 내 이후 세르비아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성지였다.
코소보 전투 이후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북쪽으로 쫓겨 베오그라드로 올라갔다.
오스만 튀르크는 이슬람을 믿는 알바니아 사람들을 대거 코소보로 이주시켰다. 1970년 경제 위기가 오자 그나마 코소보에 남아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좀 더 살기 좋았던 세르비아 본국으로 돌아간다. 어느 순간 알바니아인이 전 국민의 80%가 넘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열풍이 일자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한다.
세르비아는 자신들의 성지를 지키기 위해 코소보를 공격했다.
알바니아인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다. NATO는 고민 끝에 코소보와 세르비아 본토 공격을 결심한다. 억압받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NATO의 이런 결정을 두고 뒷말이 많다. 뒷말 중 하나는 클린턴이 자신의 성추문 사건을 정치적으로 무마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 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뒷말이 무성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이후 미국이 보인 행동 때문이다.
코소보 분쟁이 끝난 후 마케도니아 내전이 발생한다. 이 내전은 마케도니아인과 마케도니아 내에 있는 알바니아인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도 알바니아인들은 소수였으며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마케도니아 편에 서서 일을 수행한다. 이슬람 세력이 발칸에서 확대되는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고 한다.
분쟁 이후 두 나라는 각자의 기념비를 세웠다.
내 앞에 무너진 채 서 있는 두 건물이 세르비아의 기념물이고 코소보에는 빌 클린턴 거리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은 빌 클린턴을 자신들의 구세주라고 믿는다. 그래서 수도인 프리슈티나의 가장 큰 거리에 그런 이름을 붙이고 빌 클린턴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 꼴인가?
무너진 건물을 올려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분쟁 이후 알바니아인들의 복수가 두려워 코소보를 떠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