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에서 본 것 : 등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by 카렌

삼일 밖에 살지 않았는데 이 도시에서 무척이나 오래 산 것 같다. 예전에는 그런 것이 빨리 익숙해진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는데 지금은 금방 나를 지루하게 만들어 버린다.

여행을 온 사람치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뭐라도 하고 뭐라도 먹고 뭐라도 찍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뭐라도 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을 때가 많다. 얼마 전 성격 검사 같은 것을 했는데 허무주의자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허무주의에 잘 빠지냐고 하면 꼭 나 같은 사람이다. 사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과 살기 위해 먹는 사람.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맛집 투어. 그들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에는 돈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낙천적이다. 긍정적이다. 잘 웃는다. 반대로 살기 위해 먹는 사람들은 음식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는다. 산해진미가 차려져도 그 앞에서 기뻐할 수가 없다. 소식가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 배부른 것을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는 직업 중 하나가 철학자 뭐 그런 거다. 그들은 대개 염세주의자이다. 허무주의자다.

여행을 왔는데도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슥 돌아보고 왔는데 다시 보지 않아도 새로울 건 없었다. 이런 게 허무주의자의 특징이다. 그래서 나가봤자 별게 없을 거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한다. 일기를 써보려고 했는데 여러 날 쓸 게 없다. 그래도 뭔가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서 억지로 쓴다는 것이 그날의 날씨와 아침에 먹은 것. 그게 다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날씨 맑음. 아침에 빵 두 개, 홍차 한잔. 점심엔 커피 한잔과 햄버거. 저녁엔 감자조림, 흰밥. 다음 날도 마찬가지. 퇴직한 아버지의 산책길을 몰래 따라 나섰던 한 남자의 기록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일정한 코스를 두고 산책을 다녔다. 때가 되면 동네슈퍼마켓의 스낵코너에 둘러 점심을 드셨다. 그 길을 지나가다가 보면 아버지가 수첩을 꺼내어 일기를 적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 살펴보니 아버지의 일기 공책이 벽장 가득 들어 있었다. 궁금증에 공책을 펼쳐본 아들은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던 일상을 읽었다. - 19**년 *월 *일 산책. 디카페인 커피 두 잔, 날씨 맑음. 이런 식으로 반복되었던 일상. 호텔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퇴직을 한 그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나에게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퇴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가기로 했다.

리셉션에 서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나는 등대에 갈 거예요. 택시를 불러주세요.”

“등대? 택시 탈 필요가 없어요. 버스를 타요?”

“몇 번 버스를 타면 되나요?”

“아무 거나요?”

“어디서요?”

“요 앞에서요.”

호텔 문을 열고 나가 나는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요 앞이라고 했는데 정류장이라고 볼 수 있는 데가 없었다. 지나가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호텔 쪽에 가까운 곳을 가리키면서 ‘저기’라고 했다. 내가 상상하는 표지판 같은 것은 없었다. 어쨌든 그곳에 버스가 서는 걸 보고 나는 뛰어 올랐다. 20루블이었다.


30분도 되지 않아 종점에 도착했다. 근처에서 두 명의 할머니가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다가가 등대 사진을 보여주었다. 백발의 할머니가 자신의 발을 보라고 했다. 그리고 손으로 반원을 그렸다. 발의 방향은 등대를 가리켰고 반원은 그곳까지는 돌아서 가야한다는 뜻이었다. 한 여행자가 남긴 글에는 반드시 택시를 타고 가야한다고 했다. 종점에서 한참을 걸어야 한다면서. 오르막도 있었다. 내게는 그리 먼 길도 힘든 길도 아니었다. 코너를 돌자 등대가 보였다. 뭍에서 길게 길을 낸 끝에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등대를 보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까이 갔을 때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여자는 바다로 향해 돌아선 채 옷을 갈아입었다. 모래 해변은 아니었다. 작은 돌들로 이루어진 해변이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의자를 놓고 돗자리를 깔고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등대로 가늘게 이어진 길이 물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걸어서 등대에 닿았다. 등대에는 언제나 그렇듯 연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알아 볼 수 없는 키릴 문자로 등대는 도배를 하고 있었다. 누구누구 얼레리 꼴레리. 뭐 그런 내용일 것이다. 다녀간 한국 사람은 많은 데 아무도 거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착해서라기보다는 볼펜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나에게 볼펜이 있었다. 하얀 등대지만 문은 갈색이었는데 그 문에는 하얀 물감 같은 것으로 글을 적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것을 준비해오다니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나는 문에다가 그들처럼 몇 글자 적었다. 진한 갈색 빛의 나무문에 파란색 볼펜으로 적으니 유난히 강한 붉은 빛이 났다. 그래도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 글자 속의 주인공이 언젠가 혼자 여기 와서 이걸 보았으면 하고 기도했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명랑한 남자를 만났다. 가게를 보고 있는 여자가 그의 여자 친구인 거 같았다. 그는 그녀 대신 물건을 팔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서 밥과 버섯이 들어간 팩, 샐러드 팩, 콜라를 하나 샀다. 벤치에 앉아 밥을 먹는데 밥이 익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너무나 맛이 있었다. 버섯도 맛있고 샐러드도 맛있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 인지 그것들은 금방 뱃속으로 들어갔다.

명랑한 친구에게 쓰레기를 버릴 곳을 물은 후 화장실을 물었다. 없다고 했다. 나는 왜 없냐고 했다. 여기서 장사를 하는데. 그러자 그는 여긴 자기 가게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넌 볼일을 어떻게 보냐고 물었더니 바닷가에 있는 컨테이너를 가리키더니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 뒤라는 뜻이다. 내가 그곳을 향해 걷자 그가 큰 소리로 불렀다. 큰 거야 작은 거야. 그렇게 물으면서 하는 그의 몸짓이 웃겼다. 큰 거야 하고 물을 때는 두 입술로 뿌르르 하고 소리를 냈다. 나는 지퍼를 내리는 시늉을 하며 작은 거야.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럼 됐어. 하고 그가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히치하이킹을 했다. 두 명의 러시아 여자가 탄 차가 나를 태웠다. 종점에서 나는 아무 거나 버스를 잡아탔다. 타고 보니 100년은 된 듯한 내부였고 타는 사람들도 그렇게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 나를 내려 주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내 일기장에 몇 마디를 더 적을 수 있었다. 등대에 감. 낙서하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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