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수리스크
우수리스크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미용실을 찾는 것이었다. 긴 머리를 손질하고 비행기를 타고 싶었지만 비행 전날 동네 미용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좀 먼 거리까지 걸어서 문을 연 곳을 발견했지만 늦은 밤 9시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미용실을 묻는 내게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내 의미를 눈치 챈 사람들은 몸짓으로 열심히 응답했다. 그들의 손짓을 따라서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만났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내가 머리를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헤어 컷. 이라고 묻자 그들은 잠시 의논을 했고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데려다 주는 건 어때” 그러자 남자들은 “까짓 거 그러고 말지 뭐.”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따라 오세요.” 나는 그들 뒤를 졸졸 따랐다.
그들은 모두 금발이었다. 완전한 금발은 아니고 금발 사이에 새치처럼 갈색머리나 검은 빛의 머리가 숨어 있었다. 금발은 금발로 태어나서 평생 금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금발로 태어났다가 머리빛이 갈색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흑발로 태어나 백발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머리색이 변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금발과 갈색의 머리가 비슷하게 섞여 있는 것을 보고 갈색 머리를 금발로 염색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금발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을 해서 그런 것인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궁금증을 오래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걸 그들의 언어로 어떻게 물어봐야할지를 몰라서였다.
전세계 인구 비율상 금발 머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금발은 아름다운 여자의 완성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한때는 흑발이 유럽에서 그런 대우를 받았던 적이 있다. 징기스칸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였다. 위협을 받던 유럽에서 여자들 사이에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때 힘의 중심은 아시아였다. 아름다움이란 힘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금발로 염색하려는 사람이 늘어났을 때 세계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금발이 생겨난 곳은 북유럽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흑발이 먼저였다. 그곳에 대기근이 있었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발은 소수의 돌연변이였는데 살아남은 남자의 눈에 잘 띄어서 자손을 남기는데 조금 유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학생 중 하나가 미용실 안까지 들어와 여주인에게 뭐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주인이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미용실은 수다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계산대에 앉은 여자와 머리를 깎아 주는 여자와 놀러온 여자, 그리고 또 따른 머리를 깎아 주고 있는 여자와 머리를 손질당하고 있는 여자가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하나씩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놀러온 여자가 영어를 가장 잘했다. 그녀들을 대표해서 번역기를 돌렸고 흑발에 새치가 조금 있는 남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내가 대답하면 그 여자가 나름대로의 번역을 해서 나머지 여자들에게 전했다. 자기들끼리 웃거나, 그건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깎고 싶어?” 라는 질문에 나는 “as you like”라고 대답했다. “네 마음대로 한 번 깎아봐.” 또는 “어떻게 깎아도 상관없어.” 이런 뜻으로 이야기했는데 “너를 좋아해.” 이런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번역기를 돌리던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와 나 사이가 뭔데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려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루스키 스타일.” 그렇게 말하자 오해가 풀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깎는 동안 나는 혼자 여행 중이며 여자 친구는 한국에 있고 곧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게 질문하는 여자가 서른이고 열 살의 아들이 있는 이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사적인 것을 너무 쉽게 알아 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이혼녀라고 했을 때 심지어 이런 질문까지 했다. “왜 이혼했죠?” 그녀가 대답했다. “그 남자는 나를 아주 거칠게 다루었어요.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죠.” “잘 했어요. 이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닌데 이상하게 거기까지 대화가 가버렸다.
머리를 다 깎고 나는 그곳을 나가야했다. 돈을 지불하고 나니 아무 말 없이 다섯 명의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서로들 뭔가 아쉬움이 남은 것 같았다. 짧은 시간에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버린 걸까. 나는 공손히 그녀들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땡큐”하고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인사로는 이런 말이 적당한 것 같았다. “우리 함께 저녁 먹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