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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Oct 13. 2021

길이 내게 말을 건다

옛길을 걸으며

몇 년 전 친한 지인 몇 명과 한 달에 두어 번 주말에 서울 근교를 걷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걷기가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한발 두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이 불고 새들이 지저귀는 자연이 내게 말을 걸었다. 무심한 골목길도, 오래된 건물들도 저마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부실했던 몸은 단단해지고 흐릿하던 마음은 맑아졌다.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자연의 순환은 조급증을 버리고 느긋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매서운 겨울의 끝, 잠자던 대지의 꿈틀거림은 경이롭다. 조그마한 씨앗 하나가 얼었던 땅을 가른다. 굳었던 땅이 실금으로 갈라지면서 여리디 여린 씨앗 하나가 세상 속으로 나온다. 머리에 딱딱한 뚜껑을 쓴 채 애처롭게. 그렇게 솟아난 씨앗은 햇빛과 물과 바람에 자신을 맡긴다. 자연이 주는 대로 받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또 씨를 만들고 그 씨들은 자라서 숲이 된다. 때로는 거목이 되어 숲을 지킬 것이다.

 

거센 비바람에 쓰러져 바닥에 나뒹구는 나뭇가지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피어나는 꽃들을 보았다. 밟히고 부딪쳐도 다시 일어나는 초목들은 삶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쪼그만 씨앗 하나가 때로는 거친 암석을 쪼개며 뿌리를 내린다.  

햇살이 무성한 여름에 마음껏 푸름을 자랑하다가 서늘한 바람이 불면 제 몸의 수분을 빼며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잎사귀는 욕심 많은 인간을 경계한다. 가진 것을 놓을 줄 모르고 악착스럽게 움켜쥐기만 하는 인간에게 ‘비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걷다 보면 어느 때는 내가 길을 걷는지, 길이 나를 걷는지 헷갈린다.

평탄하기만 한 길이 어디 있으며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오르고 내리고 꺾어지는 길처럼 삶도 휘어지고 구부러질 때가 있다. 평탄하기만 한 삶은 박제된 액자 속의 풍경과 무엇이 다르랴. 적당한 요철이 있는 생의 서사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재밌게 한다.


길가에 무심하게 서 있는 노송 한 그루를 본다. 단지 서 있음으로써 그 나무는 지나는 길손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지친 사람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피톤치드를 내뿜어 처진 기운을 북돋았을 것이다. 바람을 막아주고 비를 가려주며 다시 그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들이 천하의 주인처럼 나부댈 때는 속으로 빙긋이 웃으며 제 자리를 찾으라고 가지를 세게 흔들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옛사람들의 흔적이 밴 길을 걸으면 사람 냄새가 난다. 처음 걸어도 오래 걸은 것처럼 길과 하나가 된다. 불편해도 그대로인 옛길이 좋다.

억지로 이어 붙인 길은 낯설다. 얼른 그 길에서 비켜나야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인위적인 손길이 많이 들어간 길은 양복 위에 갓을 쓴 것처럼 어색하다. 자연은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목재 데크로 만든 길보다 야자매트를 깐 길이 더 좋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길은 더 좋다. 전망대랍시고 철제로 만든 2,3층짜리 건물을 등성이에 떡 하니 올려놓은 곳에서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세계 5대 미봉이라는 아르헨티나 피츠로이 트레킹을 할 때의 일이다. 전망대가 있다는 자리에 나무로 된 안내판 하나만 덜렁 서 있었다. 근처에 전망대가 있나 한참 찾다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가 있는 우리나라 전망대에 내가 얼마나 익숙해졌는지를 깨달았다.

전망대뿐 아니라 산에 있는 길 안내판도 너무 크고 많다. 친절함이 넘쳐 주위의 풍경을 헤친다.


대관령 옛길은 걸었던 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다. 금방이라도 괘나리 봇짐을 진 보부상들이 저쪽 모서리에 나타날 것 같은 길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했다. 사람은 가도 길은 남아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어떤 때는 길이 내게 말을 건다. 힘들면 쉬어가고 조바심 내지 말라고 속삭인다. 없는 길에 내 발을 디디면 그건 또 다른 길의 시작이라고, 앞이 막히면 길을 만들어 보라고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걷던 길, 걸으면서 흘렸던 땀을 누군가 기억해줄까. 거기 잰걸음으로 바쁘게 살던 한 사람이 길 위에서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을 깨달았다는 것도.


울창한 숲을 파고든 햇살이 얼룩무늬를 그리며 고요히 바닥에 드러눕는다. 나는 다시 신발끈을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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