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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Sep 06. 2021

제일 좋은 복(福)

잘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내팽개쳐진 푸성귀처럼 메마르고 힘없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온다.

'너희는 별일 없이 잘 있제?’. 그 말은 ‘내가 편치 않아, 지금’이라 소리로 들린다.

 ‘무슨 일 있어요. 엄마?’. 대답 대신 긴 한숨 소리, 잠시 정적이 흘렀다.

‘또 한 사람 들어갔다’.     

얼마 전에 고관절이 부러졌다는 어르신이 요양병원에 가셨다는 말일 테다. 한 집에 대여섯 명씩 마을을 꽉 채우던 아이들이 다 떠난 뒤 빈 둥지를 지키는 어미 새처럼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머니 또래의 어른들이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마을회관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추울 때는 추워서 모이고 더울 때는 더워서 모인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모인 어른들은 돈을 추렴해서 맛있는 것도 해 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상일에 참여한다. 외지에 있는 자식들 이야기며 젊은 시절 당신들이 살았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지낸다는 소식이 한동안 들렸다.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중의 큰집 어머니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갔다는 소식 이후로 잊을 만하면 궂은 사연이 날아들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회관에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어머니의 한숨도 깊어갔다.


동시에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복 타령을 했다. 사람의 복 중에 죽는 복이 최고라는데 ‘우예 죽을꼬’를 꽃노래처럼 했다. 자식들 부담 주지 말고 잘 죽고 싶은 바람은 어머니의 종교가 되어 갔다. 죽는 것보다 요양병원에 가는 것이 더 두렵다는 어머니. 어머니의 두려움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 세대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겪어본 나는 환자를 집에서 보살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아버지의 기일에 형제들이 다 모였다. 늙고 병드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미리 걱정하지 말고 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밥 먹던 숟가락을 놓고는 창문 너머로 한동안 눈길을 보냈다.

‘너희 아버지 생각난다 아이가, 그때 너희 아버지가....’,


아버지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위염으로 판정한 의료진에서 수술을 할 동안 우리들은 병원 복도에서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심한 네모 상자 안에서 수술 도구들이 왔다 갔다 하고 환부를 덮은 푸른 천이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수술을 마무리하는 손길이 보였다. 어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일곱 여덟 시간 걸린다던 수술을 왜 하다가 말아, 위를 절제해도 사는 데는 지장 없다더니..., 어머니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아무나 붙들고 울먹였다.

나쁜 예감은 피해 가지 않는다. 보호자를 부른 의사는 환자가 위염이 아니라 췌장암 말기로 이미 손을 쓸 수 없으니 집에 가서 환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는 것이 좋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소리쳤다.

 '집으로 절대 못 가요. 저 이를 살려내야 합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어머니의 희망과는 별개로 아버지는 마침내 집으로 왔다. 석 달이 지난 후였다. 걸어서 나간 아버지는 사방이 막힌 앰뷸런스에 실려 왔다. 사랑방에 누운 아버지는 내 집의 공기가 달다며 황달기로 누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안채며 사랑채를 천천히 돌아보셨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사립문 밖으로 몇 발작만 내딛으면 동네 앞 들판이 보였다. 내일은 사립문 밖으로 나가자던 아버지는 그날 밤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 사립문을 넘은 것은 아버지의 꽃상여였다.


자식들 건사도 못하고 떠나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서럽게 울던 어머니는 아버지 초상을 치르자마자 들판으로 달려갔다. 병시중과 장례를 치르는 동안 무성하던 잡초는 입을 앙다문 어머니에게 분풀이당하듯 뽑혀 나갔고 그 해 농사는 대풍이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힘겨운 시절은 가고 막냇동생까지 결혼을 한 뒤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는데 병이 낫거든 가자고 내가 우기는 바람에 네 아버지는 저 들판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 그렇게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그것이 어머니의 가슴에 깊은 회한으로 남아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요양병원에 대한 어머니의 거부감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을 안 우리는 다 같이 한숨을 쉬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곧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웰 다잉(Well Dying)은 삶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소원일 것이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어머니의 걱정 속에서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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