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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Sep 02. 2021

아리랑

『아리랑』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장지락)의 일대기를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미국인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가 22차례의 심층 면담 끝에 써 내려간 혁명에 관한 이야기이며, 혁명가의 삶은 다룬 책이다.


내가 김 산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꽤 오래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조국’-어느 의사의 수기란 이름으로 김동인의 ‘붉은 산’이 실렸었다. <붉은 산>에 나오는 ‘삵’이라는 인물이 당시 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김산이 모델이며 소설처럼 불한당이 아니라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젊은 코뮤니스트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반공의 이데올로기가 시퍼런 칼날을 물고 있을 때 국어 선생님은 그 시대의 상황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김산이 코뮤니스트가 된 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선택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소설의 배경이 만주라는 것과,  ‘삵’이라는 인물이 숨을 거두면서 ‘선생님,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그리고 흰 옷이~”라는 그 마지막 말이 왠지 먹먹하여, 나는 김산에 대해서 언젠가 한번 읽어 보리라고 생각했다.


만주라는 지명은 아버지의 소년 시절과 상관이 있는 지명이었다. 일제의 압박과, 집안 일가 때문에 살림이 어려워진 할아버님은 장남인 아버지와 하인 한 명을 데리고 만주로 가셨다. 말하자면 이주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생활을 할 터전을 알아보려고 갔는데  만주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더라 하셨다. 먼저 이주한 조선인 마을은 곤궁함이 넘쳐흘렀고, 끝이 안 보이는 허허벌판은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짓기에 마땅하지 않으며, 되놈들의 횡포가 심해, 여간 고생을 하지 않더라며, 만주로의 이주계획은 없는 것으로 되었다.

그래도 가끔, 황량한 만주 벌판과 거기에서 본 광경에 관한 이야기를 꿈이라도 꾼 것처럼 이야기다.

약 반년에 걸친 만주기행이 어린 소년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음이 틀림없다.


님 웨일즈는 남편인 에드가 스노우와 함께 국공내전이 치열하던 시기에 중국에 있던 미국인 저널리스트 부부였다. 남편인 에드가 스노우의 『 중국의 붉은 별』이 옌안 시대의 마오쩌뚱에 관한 기록으로 유명한 책이라면, 님 웨일즈(헬렌 포스터 스노우)의 『아리랑』은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조선인 장지락(필명 김산)의 일대기를 적은 책이다.

1937년 옌안의 루쉰 도서관에서 영문책자를 빌리려던 님 웨일즈(그녀의 남편이 붙여 필명이다)는 그 누군가가 모든 종류의 책과 잡지를 수십 권이나 빌려갔으며 그 사람이 조선인인 것을 알고 그를 만나려 한다.

그전 해 조선에서 여름을 보낸 님 웨일즈는 금강산을 등산하였으며, 조선의 물난리 등을 보았고, 목가적인 풍경과 유순하고 체념적이며 인종적인 조선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극비 대표인 그 사람은 두 차례의 서신에도 답이 없다가,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것으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된다.

조선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다는 님 웨일즈의 서신을 보고 조선에 관한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녀가 느낀 조선은 완전 밀폐된 통속에 갇힌 듯 폐쇄된 나라였다. 모든 편지는 검열당하고, 모든 집회에는 일본인 첩자들이 있어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당시의 정치, 경제에 관한 서적은 한 권도 구할 수 없어서 실망했던, 이 벽안의 숙녀는 강건한  조선 청년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조선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 많은 저널리스트와, 조선의 제반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젊은 혁명가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이 강인한 남성에 대해  ‘7년 동안 동방에 있으면서 만났던 가장 매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며, 공포를 모르고 독립심과 완전한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추종자가 아니라 지도자로서 사물을 고찰하고 조선혁명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만주에 있는 어느 조선인 망명객에 관한 ‘백의민족의 영상’이라는 책을 저술하던 김산은 님 웨일즈에게 출판을 2년 동안 미룬다는 조건으로 그녀와 함께 책을 쓰기로 약속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아리랑’이다.

“나는 노트로 일곱 권이나 되는 김산에 대한 상당한 자료를 정리하고, 고쳐 쓰고, 축약하였다. 그러나 가능한 한 원래 이야기에 가깝게 하였다. 모든 자세한 점에 있어서-대화까지도 포함하여-그것은 아주 믿을 만하다. 그것들은  힘든 고생을 하면서 김산의 구술을 받아쓰는 동안에 김산에게 들은 것들이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과 뛰어난 이야기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아주 수월하게 진척되어 나갔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암호로 일기를 써왔던 것이다.”

1905년 평양 교외에서 태어난 장지락(김산)은 1919년 11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났다. 장로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공부를 계속하려 동경으로 갔다가 1년 뒤 만주로 가서 하니허 부근의 군사학교에 들어갔다가 훈춘사건 발발 직후 베이징으로 갔다. 록펠러 재단으로 설립된 베이징 협화 의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상하이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들과 접촉하고,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무정부주의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한 그는 1921-1922년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김중창(김성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1925년 광저우의 혁명 근거지에 도착하여 황푸 군관학교-뒤에 쑨원(중산) 대학으로 개명됨-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한 편 경제학과 역사 공부를 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이 소규모였던 이때 이미 중국 공산당원이 되었다. 쑨원이 북벌을 시작할 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광둥의 북벌군 근거지에 머물렀다, 광둥 봉기와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참가하였으며, 공산당이 패배한 뒤  1928.9월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 되돌아왔다. 1929년 8월 지린에서 공산당 회의가 열렸고 김산은 이 회의에 참가했다. 조선공산당의 만주 분국 해체 및 그 당원의 중국 공산당으로의 당적 이전 문제가 안건으로 올려졌다. 1930년 11월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넘겨졌으며, 조선으로 보내졌다.


1931년 4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어 6월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33년 4월 다시 중국 경찰에 붙잡혔고 다시 조선으로 이송되었다가 풀려나 1934.1월에 베이징으로 되돌아왔다. 그  이후 자오 아핑이라는 중국 처녀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는 훗날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들은 나중 님 웨일즈와 연락이 닿게 된다. 1936년 8월에 산시, 간쑤, 닝사 소비에트 지구의 조선혁명가 대표로 선발된 김산은 중국 공산당 북부 지구당 권유에 따라 옌안으로 옮겼다.

1937년 초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바로 이때 헬렌 스노우를 만났다. 김산이 항일 군정대학에서 물리, 수학, 일본어, 한국어 등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 일본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비밀리에 처형이 되었고, 1983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 그가 지녔던 명예를 모두 그에게 되돌린다. 또한 이로써 그의 당원 자격은 회복된다”라고 그의 복권을 알렸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3월 평양 교외 차산리라는 곳에서 김산은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폭풍 같은 시기였다. 왜놈들이 포악을 떨던 시기에 소년은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뛰쳐나와 양화점을 하던 둘째형의 신세를 진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가하게 되고 이것이 정치의식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고 김산은 말한다.

3.1 운동이 끝나고 일본으로 갔다가 가족에게 주라는 200원을 들고 남만주 조선민족주의자의 군관학교에 가려고 700리를 도보로 걸어갔다. 이때가 15세였다. 만주 군관학교 최저 연령이 18세였으나 순례 여행 덕에 입학시험을 칠 수 있었다. 그 뒤 상하이에 가서 이동휘, 안창호, 이광수 등을 만났으며, 뛰어난 두 명의 조선인 테러리스트인 김약산과 오성륜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김약산은 조용하고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에 심취한 냉정하고 두려움 없는 테러리스트로, 오성륜은 1922년 반일 무력시위의 주모자로 광둥 코뮌과 하이 루펑(하이펑과 루펑) 소비에트 시절의 김 산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상하이 조계에 모인 3,000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었던 김산은 광동 코뮌 때 200명의 조선 공산당 지도자가 참가하였다가 대다수가 죽었으며,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하이 루펑 소비에트)에서 조선인 15명과 참가하였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 중의 한 명이었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 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인가를 논하는 것보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낭비인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쓸데없는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가에 대해 문의하던 김산은 훗날 자신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며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이후 지금까지 김산은 결코 이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에 심취했으며, 특히 <인생독본>을 몸에 지니고 다녔던 김산의 불꽃같은 족적은 그의 친구나 동지들이 그의 가슴에 살아 있듯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건국훈장 서훈이 추서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허비하려는 나약한 인간이라면, 김산의 생애를 돌아보길 권한다.  

온몸으로 살았던 한 사내의 흔적이 당신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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