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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Nov 01. 2021

소소한 골목 풍경


  몇 년 전 길 건너 5층짜리 빌라의 1층 필로티에 작은 카페가 들어섰다. 변변한 상호도 없지만 서울에서 꽤 유명한 카페의 2호점이란다.

 통유리 안쪽의 깔끔한 커피 키친과 벽면을 따라 길게 놓인 테이블과 작고 동그란 의자들이 좁은 내부와 잘 어울린다. 일부 테이블은 창가에 붙어 있다.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리에 나서는 아파트 주민과 마주 보게 되어 있어 눈이라도 마주치면 괜히 어색할 때가 있다.


  인도의 바라나시를 여행 중일 때다. 땡볕에 돌아다니다 목이 말라 꽤 근사해 보이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미지근한 콜드 커피가 나왔다. 아이스, 아이스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뒤 망치질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구해온 얼음 한 덩이를 망치로 적당히 때려 손때 묻은 제각각 크기의 얼음덩이로 만들어 대접에 담아 와선 히죽 웃는다. 성의는 고맙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집 앞에 있는 이곳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몇 발짝 더 가면  세련된 인테리어 사무실이 나온다. 맞은편엔 나이 든 주인을 닮은 듯 묵은 티가 줄줄 나는 세탁소가 있다. 십몇 년 동안 변함없는 가게지만 주인의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은 확연히 알겠다. 이 골목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곳이 이곳이다.


  길모퉁이 빵집은 디저트 카페의 성지 코스라 가게 오픈 전 몇 미터 줄 서기는 기본이다. 단 것 싫어하는 나도 이곳의 마들렌과 휘낭시에는 좋아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자꾸 손이 간다. 좋은 재료쓰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여러 가지 빵은 오후가 되면 진열장이 훤할 만큼 인기다.  


  빵집 옆에는 작은 옷가게가 있다. 소꿉장난 하듯이 아기자기한 옷들을 아기자기하게 걸어 놓았다. 가게 안에서 옷을 사는 사람은 본 적 없지만 파스텔 톤의 내부는 꽤 고급지다. 왠지 건물 주인의 자식이 취직이 안 되자 숍을 열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가게다.


  그 옆에는 야채가게다. 나는 소비자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라 웬만한 먹거리는 그곳에서 사지만 이곳의 수입과일 앞에서는 종종 지갑을 열까 말까 망설인다. 내가 좋아하는 애플망고나 두리안이 주로 나를 유혹한다. 외국 여행 중에 산지에서 좋은 품질을 싸게 먹었을 때의 추억까지 떠올라 사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과일 가게를 지나면 떡집이 있다. 100m 거리에 대여섯 개의 카페와 빵집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떡집이지만 떡이 자꾸 달아져 발길이 멀어지는 중이다.

  떡집과 붙어 있는 네일숍은 원래 옷 수선 가게였다. 가지고 있던 미싱을 버린 후 가끔 이용하던 수선집 아저씨는 무슨 재봉 대회 금상 출신이라 솜씨가 좋았는데 네일숍으로 변한 이곳은 매니큐어도 안 바르는 나에게는 없는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인테리어가 화려한 새로 생긴 레스토랑은 전에 미용실이었다. 월세가 올라 나간다던 자리에 생긴 레스토랑은 주인과 인테리어가 한두 번 바뀐 후 지금은 자리를 잡은 듯 보인다.

소박한 동네 미용실이 고급진 내부로 바뀌는 것을 보고 인테리어 업자들의 능력에 감탄했다.


  작은 네거리 편의점 바깥 의자에는 작업복을 걸친 사람들이 편의점 도시락이나 라면에 소주를 곁들여 먹는 모습을 자주 본다. 바로 옆 학원에서 나온 학생들이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을 먹을 때도 있다. 그 편의점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다.


  주인이 자주 바뀌는 중국집도 그쪽이다. 인테리어를 할 때마다 내가 괜히 걱정이 된다. 퇴직금을 밀어 넣지는 않았을까? 융자를 받아서 차린 거면 어떡하지? 누군가의 희망을 냉큼 잡아먹고 상처를 주는 장소가 될까 봐 개업 리본이 보이는 날이면 진심으로 그 가게가 노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얹어 본다.


  편의점 대각선 방향의 부동산 사무실 중개사는 이 동네 터줏대감이다. 언젠가 미장원에서 마주쳤는데 미용실 원장님과 이 동네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이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가정식 백반집도 하나 있다. 이 집은 밥집에서 반찬 겸 야채가게로 넘어가는 중이다. 처음에는 팩에 담긴 반찬을 주르르 쌓아 놓더니 요새 제철 야채들까지 한바탕 펼쳐 놓았다.  


  큰 길가에는 꽃집이 있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만 꺾인 꽃은 싫다. 아이들이 남자 친구를 사귈 때 받아온 꽃을 버리는 것은 내 몫이었다. 시든 꽃을 분리하고 겹겹이 쌓인 포장을 걷어내면서 우리도 이렇게 과대 포장한 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화려한 포장  속에 꾸며진 모습보다 있는 대로의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무심하게 드나드는 골목길에서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는 이웃들이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하루도, 그들의 하루도 꽉 찬 날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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