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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Nov 08. 2021

걷기의 즐거움

  서귀포 중산간 지대의 올레길은 온통 귤밭이다. 자르르 윤이 나는 짙푸른 잎사귀 사이로 늘어지게 달린 주황색 귤은 초겨울의 제주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담장 너머 진초록의 배추와 무, 당근 등의 푸른색이 뭍에서 온 나를 반긴다. 내륙의 땅이 벌건 속을 드러내며 동면에 들어간 때 싱싱하게 물 오른 제주의 대지를 보는 것은 즐겁다. 이맘때의 제주는 화려하고 싱싱하다.

  뭍에서의 겨울은 언제나 성큼 온다. 불같은 가을을 떠나보내기 전에 삭정이 든 나무들을 품에 안은 겨울은 스스럼없이 와서 대지를 접수해버린다. 그 성급함을 제주에서 위로받는다.


  제주의 길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 지루하다 싶으면 덩두렷이 돋은 오름이 시야를 밝게 한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제주의 오름들은 그 생김새가 비슷하면서 다르고 오름마다 특색이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이번에 오른 통오름은 산 모양이 물통 혹은 밥통처럼 움푹 파인 오름이다. 완만하고 낮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싼 분화구 안에는 농경지가 있고 한쪽 사면 아래에는 돌에 쌓인 무덤군이 있는 주민생활과 밀착된 생활형 오름이다. 무성한 억새풀이 잠시 쉬는 곳에는 보라색의 벌개미취 꽃과 용담이 피고 그 사이로 노란 미역취도 재주껏 피었다. 해발 고도 겨우 143m이지만 주위가 평야라 시야가 탁 트인다. 독자봉과 신풍 바다 목장을 거쳐 저 멀리 보이는 표선 해안이 오늘의 종착점이다.  


  걷다 보면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비 오름을 오른 날은 비가 왔다. 또닥또닥 일정하게 리듬을 타며 내리는 빗소리와 따박따박 걷는 내 발소리가 서로 호응하며 장단을 맞춘다. 딱 거기까지는 좋았다. 해발 342m, 분화구가 3개인 따라비 오름 정상에 도착하자 내가 알라딘의 양탄자가 된 것 같았다. 세차게 몸을 밀어대는 바람에 휘청거리며 허공으로 날 것 같다. 그렇게 센 바람은 처음 겪었다. 비옷 자락을 들쑤시고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토해 내라는 듯 폐부를 찌르는 바람에 나는 신음했다. 내 팔과 다리는 통제를 벗어나 저들끼리 버둥거린다.

  저 멀리 바람의 땅 남미의 파타고니아에서도 겪어보지 바람 앞에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발바닥에 힘을 주며 걷다가 보라색 꽃밭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구절초 무리다. 줄기는 도태되고 뿌리 위에 바로 꽃을 피운 구절초를 보니 혹독한 자연에 맞선 생존본능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사람도 가누기 힘든 바람 앞에서 여리디 여린 저 꽃은 자신을 바닥까지 낮춤으로써 살아남았다.


  우리도 때로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살길을 도모해야 함을 꽃을 통해 배운다. 이렇게 두발로 걷다가 예기치 못한 발견을 할 때는 기쁘다.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곁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속으로 들어가 대상의 숨결과 자신의 호흡을 나눈다.  익히 아는 길도 두발로 걷다 보면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두루뭉술한 것이었는지 종종 깨닫는다. 대상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가벼운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자란다.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고 엉킨 사고의 실타래를 풀고 싶으면 햇빛과 바람과 구름이 함께 하는 밖으로 나서 보라. 때론 폭풍우가 치고 눈보라가 오지만 우주의 질서에 한 발짝 다가간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길의 소실점이 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꿈을 꾸며 나의 걸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작년 초겨울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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