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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Dec 04. 2021

장인어른을  위하여

 지난 시월 중순경 세 자매와 막내 동생네가 만났다. 육 남매 중 시간이 맞는 팀끼리 두세 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코로나 때문에 오랜만에 모였다. 예방접종을 모두 2차까지 마친 뒤라 큰 마음먹은 셈이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한적하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을 즐겨 찾는다. 날짜가 정해지면 단톡방에서 행선지를 정한다. 이번엔 경북의 오지 봉화의 한 휴양림에서 백두대간 수목원을 둘러보고 낙동강 세평 하늘길을 걷기로 했다. 그 지역의 장터를 찾아 특산물을 사고 제철 식품을 구하는 재미는 덤이다.


 백두대간 수목원은 아시아 최고이자 전 세계 두 번째 규모의 수목원이다. 이곳에는 지구 상에서 노르웨이와 우리밖에 없다는 멸종위기 씨앗 보관소 시드 볼트(Seed Vauit)가 있다. 시드 볼트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전쟁 및 핵폭발과 같은 지구 재앙으로부터 야생식물종자를 영구 보관하기 위해 지하 46미터에 만든 터널형 저장시설이다. 우리나라 종은 물론 외국에서 보관을 의뢰한 씨앗이 지하 저장고에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700년 전 고려시대 아라홍련의 종자라 한다. 외부인 출입금지인 시드 볼트 쪽을 멀리서 가늠하면서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가 하는 노력에 잠시 흐뭇해진다.


둘째 날의 세평 하늘길은 한국의 체르마트라는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 약 12km를 걷는 길이다. 전날 내린 비로 비동에서 분천까지 몇 군데가 물에 잠겨, 열차가 아니면 외부로 나가기가 어려운 주민들이 손수 역사를 지은 양원역에서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라는 승부역까지 걸었다.

부부끼리, 자매끼리, 동서나 남매, 시누와 올케 간 동행을 바꿔가며 볕 좋은 가을 햇살과 상쾌한 강바람을 품으며 두런두런 걷는 길은 저절로 신이 났다. 맑고 푸른 낙동강, 누렇고 붉게 변해 가는 강 건너 숲, 구름 한 점 없는 비췻빛 하늘에 취한다. 물빛 투명한 강에는 송사리 떼가 몰려다니고 억새는 하얗게 피었다.

하루에 편도 5회씩 다니는 기차가 때마침 지나가면서 물가를 걷는 우리에게 몇몇의 승객이 손을 흔든다.


하루의 완성은 지역 장터에서 구한 싱싱한 재료로 푸짐한 저녁을 먹은 뒤 막걸리를 상에 올리고 마주 앉을 때다. 풍기 시장에서 사 온 6년 근 인삼을 어슷 썰어 노릇하게 부치고 영주 과수원에서 산 진홍색 감홍 사과와 대추를 털고 있던 춘양의 시골 농가에서 구입한 달큼한 붉은 생대추가 오늘의 안주다.   


안주는 또 있다. 기억의 저편에 있는 유년과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다. 언니가 맏이답게 이 좋은 시간에 어머니가 함께 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외출하자고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도 가장 먼저 채비를 차리던 어머니는 다리가 많이 불편해서 가까운 곳만 겨우 나선다.


나는 항상 아버지를 떠올린다. 떠난 지 오래되어 얼굴도 감감한 아버지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야기가 어쩌다 아버지의 가계부로 옮겨 갔다.

청년시절 도시생활을 했던 아버지는 수입과 지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계부에는 추곡수매, 송아지 판돈, 머슴 경과 농사철 품값, 비료값 등과 우리들 이름도 자주 올라가 있었다. 학용품, 기성회비, 용돈까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가계부를 한동안 빌려갔던 당시의 서울대학교 한 연구팀이 1960년대와 70년대 농촌 생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약간의 선물과 함께 주며 말했었다.

가계부를 쓰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우리는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저절로 알았다. 여섯 형제가 다 고만고만 부침 없이 사는 것은 은연중 아버지로부터 배운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고 동생이 말했다. 쪼들릴 때도 늘 용돈을 챙겨주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감상에 젖자 형부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잔을 든다.

"얼굴도 못 본 장인어른을 위하여!"

"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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