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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기억창고
Jan 07. 2022
인연
춥다고 며칠간 집에서 웅크렸더니 슬슬 좀이 쑤셨다
.
우거지 죽상을 하던 날이 개고 기온도 살짝 올라 친구와 함께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
마스크에서 올라온 입김이 안경에 달라붙어 시야를 부옇게 만든다
.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으니 안경을 벗어야지
.
안경을 벗어 목에 두른 워머에 끼웠다
.
중간에 화장실에 들러서 거울을 보니 안경이 없어졌다
.
이게 어디로 갔나
?
오던 길을 돌아서 가기로 했다
.
길도 단순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진 않아서 금방 찾을 것 같던 안경은 출발점까지 가도 보이지 않았다
.
어차피 걷는 길 다시 되짚어 걸으며 찬찬히 살폈다
.
누군가 주워서 나뭇가지에 걸쳐 놓았나 두루 살폈지만 끝내 안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
집에 돌아와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나니 비로소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
정든 내 안경이 어딘가에 홀로 버려졌다
.
바스러진 낙엽 더미에 오도카니 떨어져 이 추위에 떨고 있는 건 아닌가 몰라
.
“
안경
,
내 안경
”
분신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
변색 렌즈라 선글라스 대용으로도 사용했던 안경을 슬픈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
“
안경만 잃어버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소
,
만약 발목이라도 삐었으면 어쩔 뻔했어.
다치지 않고 집에 왔으니 그것도 감사해야지
”
남편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거든다
.
다치긴 왜 다쳐
.
평평한 동네 산책길에서 다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내게
,
“
올해 액땜한 셈 치고 편하게 마음먹어”라고
다시 한마디 보탠다
.
“
액땜을 뭐
,
하려면 진작하지 하루 남겨놓고 무슨 땜”이라고
말하다가 멈칫했다
.
“
액땜 아니고 꿈땜
”
평소에 꿈을 잘 안 꾸는데 어젯밤에 꽤 소란스러운 꿈을 꿨다
.
누군가 뭔가를 숨겼고 그것을 찾느라 사람들이 어지러이 왔다 갔다 하는 꿈이었다
.
꿈속에서도 기분이 나빠
‘
뭐 이런 꿈을 꾸지
’
했던 것 같다
.
“
엄마
,
새로 맞출 때가 되어서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하세요
”
“
새로 맞추긴
,
맞춘 지 얼마 안 됐는데
,
쯥”
그랬다
.
그전 안경은 해외 배낭여행 중 잃어버렸다
.
원래 물건을 잘 흘리는 편이 아니지만 한 달가량의 배낭여행을 다닐 때는 꼭 뭔가 하나씩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
화장 지갑,
모자
,
선글라스 등이 말없이 나와 작별했다
.
“
안경을 잃어버린 건 엄마와 인연이 다해서 그럴 거예요
.
내가 새로 맞춰 줄게요
”
옆자리의 동료가 코로나에 걸려 재택근무 중인 우리 집 긍정의 아이콘 둘째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나를 위로한다
.
인연까지 들먹인 둘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돌다가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강의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다
.
얼굴이 참 곱고 평온해 보이던 강사가 인연은 짓고 가꾸는 거라고
,
좋은 인연을 많이 짓고 살뜰하게 보살피면 인생이 즐거워진다고 했었다
.
찬 기운에 습기가 차서 벗게 될 걸 알면서도 안경집도
,
안경 줄도 준비하지 않은 나의 무관심과 부주의가 결국 인연을 끊은 셈이다
.
있을 때 잘하라고 했는데 막 대하고 있었구나
.
하나를 잃고 나서야 내 것을 내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수고가 필요함을 다시 확인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
내 곁에 있는 것이
,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건 없는지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야겠다
.
그나저나 확실히 꿈땜은 한 셈이다
.
오늘 안경을 잃어버릴 걸 알아서 어지러운 꿈을 꾼 건지
,
어지러운 꿈을 꾸어서 안경을 잃어버린 건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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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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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떠도는 말, 기억나는 일,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에 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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