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창고 Jan 07. 2022

인연

춥다고 며칠간 집에서 웅크렸더니 슬슬 좀이 쑤셨다. 우거지 죽상을 하던 날이 개고 기온도 살짝 올라 친구와 함께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마스크에서 올라온 입김이 안경에 달라붙어 시야를 부옇게 만든다.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으니 안경을 벗어야지. 안경을 벗어 목에 두른 워머에 끼웠다.  

중간에 화장실에 들러서 거울을 보니 안경이 없어졌다. 이게 어디로 갔나?

오던 길을 돌아서 가기로 했다. 길도 단순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진 않아서 금방 찾을 것 같던 안경은 출발점까지 가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걷는 길 다시 되짚어 걸으며 찬찬히 살폈다. 누군가 주워서 나뭇가지에 걸쳐 놓았나 두루 살폈지만 끝내 안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나니 비로소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정든 내 안경이 어딘가에 홀로 버려졌다. 바스러진 낙엽 더미에 오도카니 떨어져 이 추위에 떨고 있는 건 아닌가 몰라.

안경, 내 안경

분신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변색 렌즈라 선글라스 대용으로도 사용했던 안경을 슬픈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안경만 잃어버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소, 만약 발목이라도 삐었으면 어쩔 뻔했어. 다치지 않고 집에 왔으니 그것도 감사해야지

남편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거든다.

다치긴 왜 다쳐. 평평한 동네 산책길에서 다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내게,

올해 액땜한 셈 치고 편하게 마음먹어”라고 다시 한마디 보탠다.

액땜을 뭐, 하려면 진작하지 하루 남겨놓고 무슨 땜”이라고 말하다가  멈칫했다.

액땜 아니고 꿈땜

평소에 꿈을 잘 안 꾸는데 어젯밤에 꽤 소란스러운 꿈을 꿨다. 누군가 뭔가를 숨겼고 그것을 찾느라 사람들이 어지러이 왔다 갔다 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기분이 나빠 뭐 이런 꿈을 꾸지했던 것 같다.     

엄마, 새로 맞출 때가 되어서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하세요

새로 맞추긴, 맞춘 지 얼마 안 됐는데, 쯥”

그랬다. 그전 안경은 해외 배낭여행 중 잃어버렸다. 원래 물건을 잘 흘리는 편이 아니지만 한 달가량의 배낭여행을 다닐 때는 꼭 뭔가 하나씩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화장 지갑, 모자, 선글라스 등이 말없이 나와 작별했다.

안경을 잃어버린 건 엄마와 인연이 다해서 그럴 거예요. 내가 새로 맞춰 줄게요

옆자리의 동료가 코로나에 걸려 재택근무 중인 우리 집 긍정의 아이콘 둘째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나를 위로한다.

인연까지 들먹인 둘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돌다가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강의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다.

얼굴이 참 곱고 평온해 보이던 강사가 인연은 짓고 가꾸는 거라고, 좋은 인연을 많이 짓고 살뜰하게 보살피면 인생이 즐거워진다고 했었다.

찬 기운에 습기가 차서 벗게 될 걸 알면서도 안경집도, 안경 줄도 준비하지 않은 나의 무관심과 부주의가 결국 인연을 끊은 셈이다.

있을 때 잘하라고 했는데 막 대하고 있었구나.

하나를 잃고 나서야 내 것을 내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수고가 필요함을 다시 확인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내 곁에 있는 것이,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건 없는지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야겠다.

그나저나 확실히 꿈땜은 한 셈이다. 오늘 안경을 잃어버릴 걸 알아서 어지러운 꿈을 꾼 건지, 어지러운 꿈을 꾸어서 안경을 잃어버린 건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인어른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