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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Jul 28. 2021

수도원 기행

아르메니아 수도원들


예레반은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수도다. 예레반에서 머문 며칠간 주로 수도원들을 돌아보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12년 전인 서기 301년 트리다테스 3세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 나라에는 오래된 수도원들이 많았다.

 체리의 계절이었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목에 수줍게 나타나는 마을마다 붉은 열매가 가득 달린 체리나무가 골목과 담장을 지킨다. 그 붉음이 마을을 밝힌다.    

 저 멀리 평원에 코르비랍(‘깊은 우물’이라는 뜻) 수도원이 나타난다. 황제의 질병을 치료하여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만든 성 그레고리가 13년간 갇혔던 지하 감옥 위에 세운 수도원이다. 수도원 너머로 눈으로 만든 거대한 고깔모자를 쓴 듯한 아라라트의 삼각형 두 봉우리가 위풍당당하다. 노아의 방주가 닿았다는 성경의 그 산이다. 원래는 아르메니아 땅이었으나 러시아 혁명 후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와 레닌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터키 영토로 변했다.

 수도원의 전망대에서 이제는 남의 땅이 된 아라라트 산을 동경하는 아르메니아인을 만난다. 그들의 붉어진 눈자위에 마음이 시리다. 수도원과 아라라트 산 사이의 아라스(Araz) 강 주위로 터키와의 국경선인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고대 철학자는 일치감치 말했다. 개인이나 나라나 내 것을 지킬 힘은 스스로 가져야 한다. 먼 남의 땅에서 우리가 가진 힘은 얼마나 되는지, 내 것을 충분히 지킬만한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코르비랍 수도원에서 본 아라라트 산


 호텔에서도 잘 안 터지던 와이파이가 마슈로카(미니버스)안에서 빵빵하게 터진다. 더 놀라운 것은 모니터에 우리나라 가수인 BTS 영상이 나온다. ‘DNA’, ‘아이돌’ 같은 노래들이 쉬지 않고 나온다. 테이프를 얼마나 돌렸는지 화면에 얼룩이 가득하지만 새삼 문화의 전파력에 감탄한다.     

 어느 순간 화면이 바뀐다. 살구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붉은 바위산의 성벽에 서서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노라방크(Noravank)...,’ 노라방크 수도원이 가까워졌다. 바위로 된 절벽 사이를 한참이나 달리던 차는 이윽고 붉은 산 중턱에서 멈춘다. 듬성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 너머로 몇 채의 건물이 보인다.

 난간도 없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간신히 올라 2층짜리 성모교회 내부로 들어간다. 1339년에 건설된 아스트밧사친이라 불리는 교회 정면에 제대가 있고 사방으로 난 문으로 빛이 들어온다. 돔형 내부 중앙의 종이 바람에 흔들린다. 설계자 모믹이 새겼다는 아르메니아 사도 십자가(하치카르)는 일반 십자가보다 짧고 모서리는 둥글며 조각은 정교하며 우아하다.

 최초의 순교자인 성 스테판을 기려 세운 세인트 스테파노스 교회는 벼랑에 바싹 붙어 있다. 그 옆의 오르벨리안 영묘 교회의 내부는 아르메니아 고유의 글자들이 새겨진 묘지석이 벽과 바닥을 메웠다. 4,5세기에 지어진 성 카라펫 교회는 폐허가 되어 흔적만 뒹군다. 수도원을 둘러싼 적갈색의 바위산은 벌겋게 타는 듯하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십계를 받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멋대로 상상한다.    

노라방크 수도원

 

 이란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타테브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준 사막지대와 초원, 눈 쌓인 코카서스 산맥을 고루 지났다. 4세기경 성 폴 베드로의 제자들이 순교한 터에, 11세기 말에 세운 수도원은 1600미터의 거대한 현무암 절벽이 바치고 있다. 성 다테오가 세계 최초로 대학을 설립한 곳도 이곳이다. 찬란한 영화는 간곳없고 군데군데 이끼 낀 우중충한 건물은 작은 균열도 보인다. 인위적인 보수 없이 자연 그대로 세월의 무게가 가득하다. 발코니로 고개를 내미니 아득한 협곡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수도원의 원경을 보려고 건너편 언덕으로 갔다. 이마를 맞댄 붉은 지붕은 쇠락의 흔적을 감추고 정겹다. 수도원을 떠받든 현무암은 자연이 만든 거대한 커튼 자락이다. 밖에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는데 소풍 나온 현지인들이 원을 그리며 춤추다가 우리에게 손짓한다. 이방인이 함께 하자 분위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협곡과 마을을 연결하는 5.7km의 길이의 세계 최장 케이블카가 수리 중이라 아쉬웠던 마음 흥겨운 춤사위에 실어본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 짧은 일탈이 여행 중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다테브 수도원

2019.6.


#코카서스.

#아르메니아

#수도원

#타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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