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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Jul 27. 2021

피츠로이여 안녕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페루의 리마에서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로까지의 남미 여행은 쉼 없이 달려온 네게 주는 선물이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낯선 땅, 불안한 치안에 당한 사례나 고산병으로 고생한 이야기 등이 인터넷에 어지럽게 떠돌며 '이불 밖은 위험해'라고 말했다. 여행이란 원래 낯선 것에 자신을 들여놓는 일이다. 발길을 내딛는 자만이 새로움을 발견한다. 편하고 익숙한 것들이여 잠시 안녕! 나는 호기롭게 떠났다. 은근한 두려움과 함께.


북미의 로키에서 남미의 티에라 델 푸에고 섬까지 약 7000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안데스 산맥은 여행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때로는 사막으로, 또는 설산으로  여봐란 듯 당당하게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끊임없이 유혹의 손짓을 보냈다.

드디어 안데스 산맥 중 세계 5대 미봉이라는 피츠로이(Fitz Roy) 트레킹의 거점 도시 엘 찰텐에 도착했다.

여행 26일째였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그곳은 조용하고 아담한 시골 마을이었다. 2층 침대로 된 도미토리에 짐을 풀어놓고 간단한 트레킹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여행자 숙소 사이에 맥주집과 카페, 등산용품점과 작은 슈퍼마켓, 레스토랑과 세탁소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다. 레스토랑의 24시간이라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남미에서 처음 보는 24시간 영업점이다. 마을의 중앙도로에는 배낭을 멘 여행자들과 차들이 가끔 지나다닌다.

그라시 오레스 국립공원 관광안내소를 지나 카프리 호수 쪽으로 간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나무, 물기가 달아난 풀들이 완연한 가을임을 알겠다. 4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툭 트인 전망이 나타났다. 오른쪽 절벽 아래 넓은 계곡에는 실개천 같은 강이 흐르고 그 너머에는 설산들이 이어져 있다. 갈색의 낮은 수풀 속에 하얗게 마른 꽃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고 길 끝에는 키 큰 너도밤나무들이 나타났다. 거뭇한 줄기에 허옇게 달린 수염은 청정 고지대에만 있다는 나무 수염일까.

고사목 지대가 나온다. 잿빛으로 고사된 나무들이 저들끼리 기대거나 살아 있는 나무에 제 몸뚱이를 걸치고 있다. 경사가 심한 길에는 죽은 나뭇가지들을 듬성드뭇하게  박아 미끄러지지 않게 해 놓았다. 과하지 않은 그 모습이 정겹다. 숲이 점점 짙어져 호수가 있기나 한가 싶은데 남은 거리가 얼마라는 표시판이 나온다. 흐리던 날은 개었다. 비박 장비를 맨 외국인 트레커 두세 명이 지나갔을 뿐 이 아름다운 길은 온통 우리들 차지다.


잔물결 치는 호수에 설산이 잠겼다 물에 잠긴 산은 바람결 따라 제 형태를 오그렸다 폈다 하는데 물 위의 산은 거대하게 버티고 서서 호수를 무심히 내려다본다. 호수 가운데 작은 동산에는 새빨간 단풍나무 하나가 물 위에 뜬 제 그림자를 잡으려 팔을 뻗었다. 아이들 주먹만 한 자갈돌이 맑고 투명한 물결 아래 반짝인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들은 어쩌자고 저렇게 붉게 타는가. 커다란 흰 고깔모자처럼 잔설을 뒤집어쓴 산은 군데군데 흘러내린 눈으로 하얀 휘장을 두른 듯하다. 늘어뜨린 웨딩드레스 자락처럼 낮게 퍼지며 호수를 감싸는 붉은 단풍들, 둥치에 비해 키가 작은 나무들은 손톱만 한 잎들을 촘촘히 달고 불게 탄다. 조락의 기미 없이 윤기 나는 잎들은 단풍이 아니라  꽃잎 같다 빙하를 품은 해발 3,405m의 피츠로이와 해발 3,128m의 세로또레가 호수 오른편에서 고개를 내민다. 눈부시게 환한 설원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다음 날은 일찍 나섰다. 마을의 중앙을 지나 언덕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이른 아침햇살이 고요한 마을을 평화롭게 비추고 있다. 이곳에서 보니 마을이 생각보다 크다. 또레호수 안내 표시판을 지나니 구릉지가 나온다. 마른풀과 이름 모를 꽃들이 누웠다 일어난다. 바람에 스친 씨앗들이 바람과 함께 흩날린다. 어디선가 희미한 물소리가 들린다. 오름길을 시작되면서 물소리가 커진다. 왼쪽의 가파른 절벽 아래 피츠로이 강이 보인다.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을 싣고 요란하게 흐른다. 가진 것을 훌훌 털고 자연에 순응하는 그 무위의 몸짓들에 숙연해진다. 놓아야 할 그 무엇을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지, 비우지 못한 마음을 안고 발길을 재촉한다. 또래 호수까지 왕복 7시간의 길이다.

호수 전망대에서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왔다는 노부부를 만났다. 평창 동계올림픽 코치였던 아들을 따라 평창에서 며칠 지냈는데 날씨가 무지하게 추웠다며 코가 언 시늉을 한다. 지난겨울 정말 추웠다. 피츠로이 캠핑장에 간다는 그들을 따라 다시 걷는다. 고사목 지대와 너도 밤나무숲, 키 작은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오른쪽에는 붉은 단풍 위에 얹힌 설산이 따라오고, 앞으로는 하연 연기를 내뿜는 피츠로이봉과 빙하들이 가까워진다.

넓은  분지가 나타난다.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산 아래 강물이 흐르고 그 너머는 붉은 단풍 바다다. 응결된 공기가 흰 연기를 뿜어내는 피츠로이 연봉들이 숨바꼭질을 하며 손짓하고 시퍼런 빙하들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데 시계를 보니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오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야 한다.

뛰듯이  걸으며 자꾸 돌아본다. 멀어지는 빙하와 설산이 야속하다. 마음을 활짝 열고 오감을 깨워 그 모든 것을 담아 본들 이 아쉬움이 수그러들까. 카메라를 눌러대지만 피사체에 담긴 대상들은 피사체 밖의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지는 못한다.


여행은 끝났지만 피츠로이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물결치는 붉은 단풍, 청아한 설산, 길인 듯 아닌 듯 이어지던 길.... 잡히지 않는 내 젊은 날처럼 내 곁을 맴돈다. 다시 한번 피츠로이에 간다면 순홍의 붉은 단풍 숲 어딘가에 자리를 깔고 느긋하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

'피츠로이여 안녕'하면서.


ㅡ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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