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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Jul 27. 2021

선짓국

선지를 받아온 날이면 어머니는 개선장군처럼 굴었다. 은색 양철통에 담긴 선홍색의 선지는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마루에 얹어졌다.

어떤 때는 핏물이 출렁거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뭉글거리는  연한 고체 모양으로 진득거렸다.

마을에 하루에 두 번씩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뒤였다. 가을걷이도 끝나고 장에 내다 팔 것도 없는 겨울철이었다.

아이들이 방학을 맞아 버스 손님이 더욱 줄었다.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삐삐~

마을 어귀에서 버스가 경적을 울리면 어머니는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신작로를 쳐다보았다.

서너 사람 혹은 한두 사람이 탄 버스는 먼지를 폴폴 날리며 지나갔다.

버스를 저렇게 놀리면 되나, 한두 번 그런 소리를 하던 어머니는 면 소재지 도축장에 가서 선지를 받아오겠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기겁을 했다. 반가의 부녀자가 어딜 간다고?

채식을 즐기는 할머니는 오일장 날에 사 오는 생선 몇 마리면 충분하였다.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는 어머니는 고기를 양껏 못 먹을 바엔 선지라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는데 영양을 충분히 줘야 한다는 이유도 댔다.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양반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말에 할머니는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맨 처음 선지를 받은 날 어머니는 핏빛 손으로 선지통을 안고 왔다. 들고 있는 따뱅이(똬리)는 더 붉게 칠갑을 하였다.

마루에 쿵 선지를 내려놓은 어머니는 상기된 얼굴로 '기사 양반이, 기사 양반이'라고 했다.

울퉁불퉁한 시골길 털썩대는 버스에서 한가득 담긴 붉은 핏물이 넘치고 그걸 기사가 심하게 나무랐다는 것이다.

급한 김에 따뱅이를 풀어 바닥을 닦고 연신 미안하다며 머리를 조아린 어머니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라며 화를 삭이던 어머니는 커다란 무쇠 솥에 선지를 콸콸 쏟아붓고 한 소금 끓여 냈다.

그날 저녁 식구들이 후루룩 거리며 맛있게 선짓국을 먹자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는 담에는 통을 좀 덜 채워야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연한 얼굴로 '에미야'그랬고 어머니는 못 들은 척했다.

선지를 한 번에 다 먹을 수는 없었다. 끓는 물에 튀겨 붉은 기미가 사라진 선지는 식힌 후에 깊이가 서너 뼘 되는 넓은 항아리에 담아 부엌 뒤 축담에 있는 소금 항아리 위에 놓고 성긴 대나무 채반을 얹었다. 그리고는 올 굵은 광목 보자기로 덮어두고 아침저녁으로 한 바가지씩 덜어 채마밭의 어린 배추와 안방에서 시루를 놓고 기르던 콩나물을 넣고 끓였다. 밭에서 미처 거두지 못한 풋고추까지 쏭쏭 썰어 넣은 선짓국은 칼칼하고 고소했다.


그다음 받은 선지는 은색 통에 가려 붉은 피가 보이지 않았다. 한 뼘 정도 비어 있는 양철통을 보며 어머니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햇살에 반사된 선지통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게다가 기사가 대뜸 어머니를 보자 화를 냈다는 것이다.

겨우 반반 채우고(우리가 보기엔 7홉쯤 되었다)

차비도 다 냈는데 어쩌라고, 꼴랑 요 작은 통을 짐 값을 받을 것도 아니고, 짐 값을 내라고 했음 또 내가 짐 값을 냈을 텐데 어디 본 데 없이 반말이냐고, 제대로 대꾸를 못하고 눈치만 보고 온 스스로가 무척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세 번째 선지를 받으러 간 날 어머니는 광에서 비닐을 한 뭉치 끊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양반, 상놈 구분 없이 잘 살던 때였고, 식구들을 먹이겠다는 며느리에게 대놓고 탈을 잡을 수 없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삐삐~

버스 소리가 나고 어머니가 왔다.

철철 넘치도록 가득 채운 선지통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그 사이 면을 튼 도축장 직원에게 버스기사한테 당한 설움을 이야기하면서 넘치지 않게 비닐에 잘 담아달라고 하면서 아이들이 잘 먹어서 자꾸 온다고, 아이들 얘기를 들은  직원이 비닐 서너 겹을 더해 가득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그걸 버스 정류장에서 집에서 가져간 비닐로 다시 한번 꽁꽁 묶은 뒤 어머니는 기선제압에 나섰다.

'기사 양반'

큰 소리로 부른 어머니는 처음에 경험이 없어서 버스에 핏물이 흘러넘친 것을 다시 한번 사과하고, 두 번째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반말로 사람 주눅 들게 한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따졌다.

나도 사리를 아는 사람인데 기사 아저씨가 그리 야단칠 게 뭐가 있느냐. 식구들 먹이려고 하는 건데 시골에 산다고 무지렁이로 보이느냐...

어머니가 조목조목 따져대자 기사 양반이 한발 물러섰다.

'아주머니 그게 아니고'

논쟁은 어머니의 승리로 끝났다.

어머니는 이유 없이 당하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농사를 천하게 보는 것에 반발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얼 먹고 사느냐, 그러니 농사짓는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기사 양반과 한바탕 한 뒤에 어머니의 선지통은 아무 문제없이 실려 다녔다. 오히려 기사 양반이 무거운 선지통을 받아서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말을 끊었다.

내가 암말 안 했으면 계속 무시당했을 거 아니냐.

사람은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겨울 우리는 어머니의 무용담을 가끔 들으며 선짓국을 물리도록 먹었다.


ㅡ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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