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창고 Dec 12. 2021

초상과 김장


지난주에 고향에 갔다.

마침 그날은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옆집 아저씨의 장례식날이었다. 요양병원에 갔다는 소리를 들은 게 얼마 전인데, 큰 고통 없이 떠나서 가족들이 다행으로 여긴다고 전한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휑해져 가는 마을에 또 한 분의 동년배를 잃게 된 상실감과 허전함은 한동안 어머니를 괴롭힐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우선이 되어 버린 마을. 한 집 건너 빈집이다시피 한 고향은 언제부턴가 부러질 때를 기다리는 삭정이처럼 위태해 보였다. 젊어서 고향을 떠난 자식들은 외지에 뿌리를 박고, 남아있던 어른들은 하나 둘 병이 들어 결국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가버렸고 지금도 가고 있는 중이다.      


저녁에 조문을 갈까 하다가 슬픔이 좀 추슬러진 후에 가기로 했다.

다음날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선 길에 옆집에서 뜻밖의 풍경을 보았다.

검은 상복을 입고 머리에 하얀 핀을 꽂은 내 소꿉친구였던 한 살 아래 큰 딸, 동생과 동기인 작은 딸, 며느리와 아들이 마당에서 김장배추를 씻고 있었다. 아침에 씻는 것으로 보아 장례를 치른 뒤 집에 와서 배추를 절였을 것이다. 가족끼리 김장 날짜를 정하고 준비 중에 상을 당한 것 같았다. 커다란 고무통에 든 배추를 꺼내고 그것을 받아 물을 가득 채운 물통 서너 개를 거쳐 채반에 옮기는 모습이 잘 짜인 무언극의 배우처럼 보였다.

상중이 아니었으면 즐거운 담소와 노동의 흥이 가득할 자리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로 말을 잃은 극 중 인물들은 굳은 표정으로 손놀림만 재바르게 왔다갔다 한다.

검은색 상복과 소금에 절여진 푸른 배추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슬픈 수채화를 보는 듯도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아흔이 넘어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낸 가족을 보냄과 동시에 일 년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모습에서 어릴 적 자주 듣던 그 말이 떠올랐다.


집집마다 대여섯의 아이들과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보통 3대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의 마을은 항상 활기차고 분주했다.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어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초상집에 들러 상을 당한 가족을 돌보고 일을 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곡기를 끊은 할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어르다시피 하며 밥을 떠먹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건강한 삶을 연대하던 옛날 마을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내 나이가 그때 그들의 나이와 비슷해졌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흐린 날의 그림자처럼 우리 곁에 머물러 있던 죽음이 어느 날 쨍하고 나타나 한 사람의 우주를 거두어 갈 때까지 산 자로써의 할 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일들을 온전히 해낼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복을 입고 김장하는 모습은 죽음이 삶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처럼 보였다.

푸른색이 보여주는 희망과 생기, 평온함과 젊음은 검은색이 나타내는 죽음과 권위, 불안과 우울보다 더 도드라져 보였다.

흔치 않은 일상을 엿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 알뜰하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작가의 이전글 숨 좀 쉽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