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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Feb 27. 2022

우이도

새벽 4시 반,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제 종일 걷느라 무거워진 몸이 바닥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두어 차례 알람이 더 울린 뒤에야 그 사람의 흔적을 찾는 날임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풍랑을 만나 온갖 역경을 겪다 3년여 만에 귀향한 한 남자의 고향은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까.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선다. 도초도 여객선 터미널 앞으로 비금도와 도초도를 잇는 서남문대교가 어둠의 바다를 지키는 지렛대처럼 버티고 있다.

우이도로 가는 섬사랑 6호가 부연 새벽을 밀치며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의 아이스박스가 배에 실린다. 저 안의 해산물들은 목포로 가서 누군가의 식탁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바다 한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바다 건너 산등성이로 말갛게 해가 떠오른다.     

 

우이 2구 돈목항에 내려 마을로 들어서자 얼큰한 생선찌개 냄새가 대충 끼니를 때운 나의 식욕을 자극한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돌담은 아침 햇살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고 담 너머 빨랫줄에는 홍어, 아귀, 농어 등이 매달려 해풍에 건들거린다. 민박 팻말이 붙은 집주인이 일행 중의 한 사람과 구면이라 커피 한잔 마시라고 우리를 붙든다. 달달한 삼박자 커피가 덜 깬 세포를 깨운다.  


드넓은 돈목해변은 이제 막 물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물빛에 햇빛이 더해져 은은하게 빛나는 모래사막을 뛰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저 끝에 억만년의 모래가 산을 이룬 풍성사구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사구로 가는 길은 모래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다년생 통보리사초의 군락지이다. 하얀 모래밭에 가늘고 긴 초록 잎새와 통통한 진갈색의 열매가 그늘을 만들며 어울렁 더울렁 시선을 잡는다.


우이도는 공사 중이었다. 마을에서 마을을 잇는 도로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파헤쳐진 산허리는 허연 내장을 드러낸 채 시들어 가고 있었다.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고민했을 텐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픈 자연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은 잠시 접고 상산봉으로 올랐다. 한 단계 오를 때마다 시야가 탁 트인다.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왔던 길 너머 펼쳐진 울울한 바다와, 그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들이 햇살에 졸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 하산길을 재촉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우이 1구 진리마을로 내려갔다.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은 우이도에서도 한동안 살았다. 그의 서당터에는 노란 유채꽃이 피었고 마을 안쪽의 집터에는 실한 마늘이 자라고 있었다. 그의 저서를 딴 영화 ‘자산어보’가 2021년 3월에 공개되었고 그 영화에 나오는 초가집은 도초도의 한적한 해변에 있었다. 나는 그가 엮은 ‘표해시말’의 주인공 문순득의 흔적이 더 궁금했다.


우이도의 홍어장수 문순득은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3년 2개월간 표류했다. 오키나와, 루손, 마카오, 난징, 베이징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고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에게 구술하여 나온 책이 ‘표해시말’이다.


섬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홍어장수 문순득’에 관한 책을 내리 3권 읽을 만큼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머무는 곳의 언어와 풍속을 익혔고,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했다. 현지인들과 교류하며 주변의 풍속과 지리를 살폈다. 그가 전한 오키나와의 언어는 지금도 그곳의 전통 공연예술에 남아 있고, 일본, 필리핀, 중국의 생생한 풍속은 조정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정약용은 문순득이 전한 마카오의 화폐제도를 듣고 조선의 화폐개혁을 제안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9년이나 제주도에 억류 중이던 필리핀 사람들의 통역관이 되어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데 공헌하여 종 2품 벼슬까지 받은 홍어장수 문순득.      


마을 안쪽에서 생가터를 찾았다.

‘우이도 홍어상인 문순득(1777~1847) 생가’ 푯말 너머로 파란색을 칠한 지붕 아래 뒤틀린 문짝과 벽의 회칠이 벗겨진 집이 나타났다. 마당에는 잡풀이 자라고 있었다. 생가를 관리한다던 후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생가터에서 씁쓸해진 마음을 위로하듯 전국 115개의 국가어항 중 하나인 우이도항에는 바다를 보며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는 홍어장수 문순득의 동상이 진리 마을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불행에 좌절하지 않는 용기와 낯선 환경에 거침없이 적응하며 살길을 도모하는 그의 도전 정신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지금이라도 홍어를 실은 배가 항구로 들어올 것 같은 우이도 앞바다에 어선 몇 척이 지나간다.   

  


* 어항은 국가어항, 지방어항, 어촌 정주어항으로 구분하는데 이중 이용범위가 크거나 도서 벽지에 소재하여 어장 개발과 어선 대피에 사용되는 국가어항은 2021년 현재 115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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