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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Apr 24. 2022

꽃들에게 묵념을

오랜 가뭄을 달래던 비가 그치고 바람이 쌀쌀한 주말이었다.

모처럼 들린 화원에는 봄이 가득했다. 빨간 꽃, 흰꽃, 노란 꽃 등 모양과 색깔이 다른 온갖 꽃과 반지르르 잎사귀에 윤이 나는 관엽식물들이 잿빛 겨울에 지친 안구를 정화시킨다.


화원 안은 제법 붐볐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도, 노년의 부부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아름다운 꽃을 보니 자연스레 입꼬리가 펴지면서 굳은 근육이 풀리는 것이다. 어떤 이는 들고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이것저것 화분을 골라 담고, 누군가는 지그시 눈을 감고 향기를 맡는다.


한때는 나도 화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봄이면 새로운 꽃을 찾았고 집안 가득한 꽃향기에 취하곤 했다.

꽃은 저절로 피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꽤 품이 들어가는 일이다. 작은 꽃씨가 발아하여 싹을 틔우고 예쁜 꽃을 피우려면 관심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적당한 온도와 물, 신선한 공기가 닿아야 한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내 집의 많은 화분을 정리했다. 때맞춰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고 너무 빨리 자라는 식물의 줄기를 자르는 자잘한 일상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관엽식물 몇 개만 남기니 거실과 베란다가 넓어졌다. 그렇게 꽃과 멀어지면서 꽃집과도 자연히 멀어졌었다.

화원 한쪽에 호접란이 현란한 색을 뽐내며 눈길을 잡는다. 꽃도 오래가고 색깔도 화려한 이 꽃을 몇 년간 키웠었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 내가 키우던 꽃들이 나도요, 나도요 하면서 얼굴을 내민다.


새초롬하게 여러 촉을 내민 시클라멘, 동글동글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산호수, 분홍꽃을 피운 제라늄과 페라고늄, 팝콘 베고니아, 거실 한쪽 벽을 다 채우다시피 했던 스킨답서스와 호야, 노란 카라, 로즈메리 등등.

꽃에 질세라 몬스테라, 행운목, 관음죽, 산세베리아와 크로톤, 파키라 등 관엽식물이 덩달아 얼굴을 들이민다. 자세히 둘러보니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펼 정도로 많은 꽃과 나무들이 나에게 달려든다. 내가 이렇게 많은 꽃을 키웠나?


20년 넘게 키운 군자란은 예년보다 훨씬 붉은 꽃을 장렬하게 피운 후 시나브로 사그라들었다. 진분홍 꽃이 예쁘던 유도화도 꽤 오랫동안 키웠는데 그 꽃의 독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나의 아이들이 유도화 꽃이나 잎을 입에 넣었다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꽃은 이사 중에 화분이 깨지면서 버려졌다.

나머지 꽃들은 내가 그 꽃을 가꿨다는 것, 그 화분들이 놓인 장소가 기억나기는 했지만 어떻게 버려졌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반려견이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온 가족이 한 달 넘도록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이별이 너무 힘들어서 두 번 다시 강아지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내가 키우던 식물들하고는 비교적 쉽게 작별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 꽃들이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기억하냐고 내게 마구 대들고 있다.

‘그래. 미안하구나. 미안하고 말고’

나는 꽃들에게 묵념을 보냈다. 그 미안함을 지금 내 손에 들린 묘목을 더 잘 가꾸는 것으로 덜어보려 한다. 언젠가 이별의 날이 오면 함께 한 순간들을 잘 기억해야겠다.

화원을 나서니 찬 바람이 볼을 때린다. 그래도 봄은 봄이다.    


2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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