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에 내가 알게 된 것

토끼몰이

by 기억창고

며칠 새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쉬엄쉬엄 눈발을 뿌린다. 교실에 앉은 우리는 날리는 눈처럼 좀체 마음을 잡지 못한다. 낼모레가 방학이라 제대로 된 수업은 없는 때였다. 학과 시간은 건둥건둥 지나고 각 반 아이들의 대화 소리는 벌떼가 되어 복도를 웅웅거린다.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한다. 여학생들은 창가에 턱을 기댄 채 크리스마스트리로 변한 나무들을 보며 저마다의 감상에 사로잡힌다.


종례시간에 선생님은 ‘낼은 수업 준비 대신 두꺼운 양말과 장갑, 목도리를 하고 와라. 여분의 양말도 가지고. 현장학습이야’라고 한다. 한 겨울의 현장학습이라니?

선생님은 칠판에 산을 하나 그리고 위, 아래로 화살표를 긋는다.

“며칠째 온 눈으로 먹이를 찾아 헤매는 토끼를 잡으러 간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서 위로는 날쌔게 올라가지만 아래로는 잘 못 내려가. 1, 2학년이 기슭을 막는 동안 3학년은 선생님과 토끼를 아래로 몰 거야. 위에서 쫓긴 토끼가 아래로 내려가면 퇴로를 막아서 잡는다. 궁금한 것 있나?”

궁금하긴요. 안 그래도 달뜬 열네 살의 시골 아이들은 신이 났다.


다음날이다. 안전에 대한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학교 후문을 나선다. 비탈진 언덕의 기와집, 슬레이트집, 초가집들이 눈을 덮고 까무룩 졸고 있다. 까치밥으로 남긴 감은 눈 속에서 시리도록 붉다. 어느 집의 대나무가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길을 막았다. 진녹색 시누대를 대숲으로 밀자 한 무더기의 잎들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눈을 쏟아 낸다. 짧은 순간 눈보라가 일고 무지개가 빛난다. 사금파리를 편평히 박은 흙 담에도, 자갈이 깔린 골목에도 눈은 소복소복 쌓였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작은 개울이 나온다. 흰 눈을 뒤집어쓴 조약돌이 바닥의 물과 어우러져 희고 검은 대비가 신비감을 더한다. 들판 저편에 우리의 목적지가 뒤집은 종지처럼 오도카니 엎드렸다.


옷 젖기 싫어하는 친구는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발자국이 더해질수록 단단해진 눈이 반들거린다. 나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선구자인 냥 일부러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 발을 딛는다. 건조한 날씨와 차가운 기후로 제 형태를 유지하는 거친 떡가루 같은 눈일지라도 이내 바짓단이 축축해진다. 저 멀리 눈 쌓인 논밭에서 개 몇 마리가 웡웡거리며 몸을 비비고 구르며 뛰어다닌다.


기슭에 도착하니 산 위쪽 선발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진다. 선생님이 간격을 맞추라고 소리친다. 관목 숲 사이로 희끗희끗한 붉은 열매가 나목에 달려있다. 산사나무나 팥배나무일 터이다. 갈색 떡갈나무에 매달린 검붉은 청미래 열매를 따서 입안에 넣는다. 씨앗에 달라붙은 쪼그라진 과육이 대추씨 씹는 맛이 난다.


“거기, 거기 막아”

바로 눈앞으로 토끼 한 마리가 내려온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비껴 섰다. 넓어진 공간으로 토끼는 달아나고 탄식의 소리가 들린다. 사지에서 벗어난 토끼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다시 ‘우우’, 이번엔 덩치 좋은 남학생 몇이 뛰어들어 잡았다.

‘와아’, 함성이 인다.

함성이 몇 번 더 일고 선발대와 후발대가 뒤섞이면서 토끼몰이는 끝났다.


포획의 기쁨은 흩날리는 눈이다. 한 명이 눈을 집어 공중으로 날리자 기다렸다는 듯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진다.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된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에게나 던져댄다. 누가 나뭇가지를 흔들자 눈사태가 났다. 아이들 함성에 놀란 듯 가만있던 나무도 촤르르 눈을 쏟아낸다. 벌써 해가 중천인 것이다. 눈이 날릴 때마다 영롱한 오색 빛이 공중에 흩어진다. 한 아이가 눈밭에 드러눕자 너도 나도 눈밭에 드러눕는다. 깔깔거리고 껄껄거리며 웃는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끼몰이하던 그날,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어린 짐승의 애절한 몸부림이 가끔 생각난다.

살면서 가끔 코너에 몰린 기분이 들 때 전력을 다해 도망가던 그 모습을 생각한다.

죽을힘을 다하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